[2016-08-22-월-아침묵상 동정마리아 모후 기념일]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는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인내와 믿음을 보여 준 테살로니카 교회를 자랑스러워한다며 인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하고 질타하시며, 어리석고 눈먼 그들의 위선을 낱낱이 거론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시작입니다. 1,1-5.11ㄴ-12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3-22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그중 하나는 그들이 너무나도 율법에만 집착한 것이지요. 율법은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율법 자체가 하느님은 아니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율법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만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기보다는, 그저 눈에 보이는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얽매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경향에 빠지기 쉽지요. 만일 그렇다면 이웃의 아픈 상처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보다는 이웃이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만 따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늘 신앙생활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 나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있는가?’
이런 점을 늘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깨닫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생활 속에서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굳센 지혜와 의지를 주님께 청했으면 합니다.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사소한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마치 손가락 을 다친 어린아이처럼 동정과 위로를 얻으려고 달려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을 당신의 눈동차 처럼 아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사랑과 인내로써 견뎌내십시오. ....
하느님은 우리의 초라하고 겁많은 본성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재미없고 단조롭게 느끼며 선행에 싫증을 느낀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은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직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계십니다. 계속 주님께 봉사하십시오.[봉사의 주된 요소]
2.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율사와 바리사이의 불행선언의 내용입니다.
1.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2.개종자 한 사람이 생기면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3.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완전히 분별력을 잃은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이다.
위 셋의 불행선언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만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예수님이 예리하게 직시하고 통찰할 수 있음은 바로 그분의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겸손한 자만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통찰하는 지혜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겸손의 수행이 없으면 악마도, 위선자도, 눈먼 인도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예전에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대형화’였습니다. 대형화된 교회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필요한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화된 교회는 신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신자들은 더 많은 헌금을 내야 됩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중산층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 병자들, 장애인들과 늘 함께 하였습니다. 중산층화 된 교회는 풍요와 축복을 이야기하기 마련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의 문턱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제도화’였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어렵습니다.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사랑과 관용, 이해와 용서가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법과 규정으로 신자들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돈님이 되는 것이고, 돈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게 됩니다. 교황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하셨듯이, 지금의 모든 문제들은 종교 간의 갈등 때문이 아닙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 때문이 아닙니다. 자본이 가져다주는 화려함과 풍요에 중독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양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이라는 곳간에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본적인 치유는 물질보다는 정신이 더욱 소중하다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피부의 색, 직업과 직책,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평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규칙적인 생활, 긍정적인 마음, 더불어 살아가려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하루의 생활을 성찰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나눈다면 세상은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욕심과 미련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강물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와 영혼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틀에 갇히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거짓의 틀을 깨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들이라고 하시고 그들의 불행을 선언하시면서 탄식하십니다. 이는 단죄가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는 호소입니다. 사실 율법학자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았고,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형성된 엘리트들이었던 바리사이들은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규율에 얽매인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하느님 경배보다는 조상들의 전통과 할례 때문에 유다교에 개종한 외교인들은 가정 관계를 포기해야 했고, 개종할 경우 율법이 허락하지 않는 이혼까지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개종한 외교인들은 율법에 집착한 나머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대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예루살렘 함락 후에는 유다교의 포교활동이 더욱더 활발해지고 교회 선교활동과 대치되기 시작하면서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도외시한 채 율법을 절대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잠가버렸습니다(23,13). 곧 그리스도 신앙을 배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무효라고 해석하는 유대교 율사들의 곡해를 지적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전과 제단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니 당연히 맹세가 성립되며, 그것을 두고 한 맹세도 존중하라고 하십니다(23,16-22). 이런 지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지도자들의 몰상식과 판단력 부족을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하느님만이 일상생활의 최후의 기준이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교회와 사회,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지도자들에게는 일정한 직무와 사명이 주어지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권한의 본질은 사랑이요, 그 목적은 공동의 선과 사랑의 완성이며, 권한 행사의 방식은 섬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근본을 착각하여 바리사이들처럼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거나, 인간을 소외시킨 채 규범을 절대시하고 제도에 매이는 처신을 한다면 하느님께로 가려는 선의의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 참 역겨운 것들이 많지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과 법을 이용하여 스스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보다 역겨운 것은 없겠지요.
정치공동체에서는 물론 교회에서도 하느님께서 존엄한 생명으로 창조하신 인간을 도외시하고 도구화하는 그 어떤 규범이나 제도도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정의가 모든 이들에게서 꽃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비단 종교지도자나 국가 지도자들만의 책무는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야 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왕직을 받은 우리도 규범과 제도를 절대시하며 거기에 매여 살고 있지 않은지, 언행 불일치의 삶과 사랑의 망각 속에 혹시 하느님께 나아가려는 이들의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겠습니다. 이제 마음을 다잡고 사랑의 마음으로 기쁨과 행복과 하느님의 선을 전하는 디딤돌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5. 막스 비어의 소설 ‘행복한 위선자’는 비양심적인 악인 로드 죠오지 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행동에도 야비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미어리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얼굴이 저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어” 하고 그를 거절했습니다.
로드 죠오지 헬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고심한 끝에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미어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녀와 결혼하게 된 그는 날마다 그의 위선을 감추고 참을성 있게 너그럽게 보이려고 힘썼습니다. 좋은 사람같이 보이려고 끊임없이 그의 나쁜 성질을 억눌렀습니다.
어느 날 옛 친구가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로드 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면이 벗겨졌을 때 거기에는 인자한 얼굴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로드 죠오지 헬이 자신의 성격을 억누르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얼굴모습은 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고, 필요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순결하게 정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그 속에서 인내와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이유 있는 시련으로 여기고 잘 참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가 된다고 말합니다...주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베냐민을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가 하찮은 것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을 주셔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텐데’, 혹은 ‘죽으면 죽지 뭐’라는 포기를 받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우리 힘을 빼앗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우리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2016년 8월22일 월요일,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오늘의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율사와 바리사이의 불행선언의 내용입니다.
1.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2.개종자 한 사람이 생기면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3.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완전히 분별력을 잃은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이다.
위 셋의 불행선언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만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예수님이 예리하게 직시하고 통찰할 수 있음은 바로 그분의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겸손한 자만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통찰하는 지혜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겸손의 수행이 없으면 악마도, 위선자도, 눈먼 인도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와 영혼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틀에 갇히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거짓의 틀을 깨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 더불어 살아가려는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하루의 생활을 성찰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나눈다면 세상은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욕심과 미련 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강물을 볼 수 있다면,
아무런 대가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고, 필요하다면 우리는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순결하게 정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베냐민을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가 하찮은 것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난을 주셔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텐데’, 혹은 ‘죽으면 죽지 뭐’라는 포기를 받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우리 힘을 빼앗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우리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 2016년 8월22일 월요일...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수산나 -
가죽나무 1
가죽나무 2
가죽나무 3
가죽나무 4
가죽나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