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6-화-아침묵상 복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문제가 있을 때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는 이들에게,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그릇된 일이라고 나무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열두 사도를 뽑으신 뒤, 평지로 내려오시어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는 군중을 치유하신다(복음).
제1독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6,1-11
복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2-19
오늘의 묵상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선택하는 일은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므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깊은 친교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하시려고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사람들을 뽑아 사도로 파견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이루어진 결정은 하느님의 계획을 완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알려 주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하느님의 능력이 당신에게서 나옴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일을 선택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함부로 상대방을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마십시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어진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는 각자의 능력과 재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능력과 제자들의 힘은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어제에 이어 제1독서는 코린토 교회 공동체의 어둠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코린토 교회 공동체 내의 ‘불륜에 대한 단죄’ 였고, 오늘은 교우끼리의 송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있는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통해 성장, 성숙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특히 어제 불륜을 저지른 형제는 공동체에서 내쫓으로라는 구절에 대한 주석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1코린5,5)
이 구절에 대한 주석입니다.
‘사탄의 힘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공동체에서 내쫓김으로써, 그 죄인은 사탄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벌은 치료의 성격을 지닌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을 받으면 회개를 하여 주님의 날, 곧 마지막 심판때에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는 어제의 불륜에 이어 오늘은 교우들의 송사에 관한 것입니다.
웬만하면 세상 법정에 가지 말고 좀 손해를 보더라도 자체적으로 성도聖徒답게 조용히 지혜롭게 해결하라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이 모두가 사탄의 유혹에 빠진 결과입니다. 공동체 밖은 물론이고 공동체내에서도 사탄의 유혹은 끝이 없습니다.
이래서 분도 수도회의 모토인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공동체의 하느님 중심의 일치에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한결같은 항구한 공동기도가 공동체는 물론 개인을 사탄의 유혹에서, 분열의 유혹에서 구원해 줍니다.
기도할 때는 찬미 감사이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불평 불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입니다.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후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십니다.
열두 사도는 순전히 주님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열두 사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이어 예수님을 중심으로 무수한 이들이 모여들었으니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은 낫게 되고 예수님께 손을 댄 이들은 모두 그분에게서 나온 힘으로 고침받았다 합니다.
이 모두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과도 상의하시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적인 재능과 성장배경, 성품, 재물의 소유 정도 등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조건, 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철저한 주도권에 의해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 불린 우리임을 기억해야겠지요.
빛이 없는 어둠 가운데서 그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바꿔나가는 것은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밤새워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셨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들이 바로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도구, 정의의 활로가 될 수 있겠지요.
오늘도 먼저 사랑을 보여주시고 사랑의 길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사랑의 연장’이 되어 주님을 추종하는 헌신과 투신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4. 오늘 독서에 의하면 코린토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라며 나무랍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이 세상과는 분명 구별되는 공동체인데도 자신들을 탈출시킨 그 세상에서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이 개탄스러웠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이 힘들다고 다시 파라오에게 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당신 아드님의 피로 씻으시고 가죽으로 덮어주셨듯이, 상대의 잘못을 우리 희생으로 덮어주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임신하고 돌아온 성모 마리아를 의로운 요셉이 모른척 파혼하여 넘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벌거벗은 노아를 보고 비웃었던 아들 함은 저주를 받았고 그 몸을 보지 않았던 나머지 두 아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일을 했기에 남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사람의 송사를 어떻게 동물들에게 가서 판결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세속 자녀들에게 판결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물들에게 당신 피로 새겨진 이름들을 주시며 사람의 지위로 높여주셨습니다. 교회는 그 구성원이 이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 우리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상 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면 오늘 독서를 꼭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5.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들입니다. 외적 자유보다는 ‘내적 자유의 사람들’입니다. 내적으로 자유롭지 못함은 죽은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자유를 착취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도, 또 자기 스스로 짓누린 사람에게 주님은 우리의 내적 자유를 지켜주십니다. 주님 안에서 내적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인영균 끌레멘스 수사신부)
6. 우리 삶은 매우 어려운 하나의 전쟁이라는 것은 정말입니다. 매일 하나의 작은 다툼이 일어납니다. 가족의 문제, 일 문제, 다른 사람과의 인간 관계 등으로 발생합니다. 사실 이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집착에 기인합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 이 순간에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멈춤(쉼)입니다. 쉼 없이 계속 걸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참된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곧, 마음의 기도와 마음 안에서 침묵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마음의 기도를 바치는 이들 위에 당신의 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3-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바로 그 지혜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그렇지만, 사실 우리는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나쁜 유혹은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죽음에까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가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 계속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만 아니라 그분과 우리의 십자가도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우리의 십자가가 개인적 집착을 끊어버리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인영균 글레멘스 수사신부)
2016년 9월6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오늘 독서에 의하면 코린토 교회에서 이교도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는 송사가 있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라며 나무랍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당신 아드님의 피로 씻으시고 가죽으로 덮어주셨듯이,
상대의 잘못을 우리 희생으로 덮어주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임신하고 돌아온 성모 마리아를 의로운 요셉이 모른척 파혼하여 넘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벌거벗은 노아를 보고 비웃었던 아들 함은 저주를 받았고 그 몸을 보지 않았던 나머지 두 아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일을 했기에 남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사람의 송사를 어떻게 동물들에게 가서 판결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세속 자녀들에게 판결해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동물들에게 당신 피로 새겨진 이름들을 주시며 사람의 지위로 높여주셨습니다.
교회는 그 구성원이 이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 우리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상 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면 오늘 독서를 꼭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은 매우 어려운 하나의 전쟁이라는 것은 정말입니다.
매일 하나의 작은 다툼이 일어납니다. 가족의 문제, 일 문제, 다른 사람과의 인간 관계 등으로 발생합니다.
사실 이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집착에 기인합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 이 순간에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멈춤(쉼)입니다. 쉼 없이 계속 걸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참된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곧, 마음의 기도와 마음 안에서 침묵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 계속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그분과 함께만 아니라 그분과 우리의 십자가도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우리의 십자가가 개인적 집착을 끊어버리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아멘-
- 2016년 9월6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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