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심화반 제7강 글짓기 <사장(死藏)되는 수첩과 나>]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수첩은 빨간색이다. 나는 서울 소재의 여자 대학을 1972년에 입학하여 1976년에 졸업했다. 우리 과 정원이 20명인데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졸업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약간의 이상(異常)이 있기는 하다. 한 명이 대학교 2학년을 수료하고 결혼을 했다. 그 당시의 교칙이 결혼하면 퇴학해야하는 규정이 있어서 중도하차를 했다. 비록 졸업장을 받지 못했지만 그 친구는 대학 동창회 기금 마련에 기부금도 잘 내고, 졸업 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이는 동기 계모임에 빠짐없이 나온다. 또 한 명은 1년 선배인데, 휴학을 해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후배인 우리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선배이면서 동기가 된 그 친구 역시 정기 계모임에 잘 나오고 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휴학 전 동창회, 휴학 후 동창회 2군데를 모두 참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의 대학 동기 계모임 대상자는 모두 21명이다.
2013년 3월28일~30일, 2박3일 일정으로 대학동기들이 제주도로 회갑기념 여행을 갔다. 21명 중 14명이 뭉쳤는데, 2명의 친구는 바쁜 일정 중에 틈을 내어 1박을 합류하여 주었다. 다행하게 우리 과는 동기 21명 전원이 살아서 건재하다. 1,2학년 때 교양과목을 함께 배웠던 20명 정원의 다른 과는 젊은 주임교수님을 설암으로 잃은 것을 위시하여 3명 친구의 비보(悲報)가 있었다.
대학교에서 발행하는 빨간 수첩 이야기를 하려다가 옆길로 샜다. 1976년 졸업하여 2016년 작년까지 해마다 동기 계모임에서 총무가 이 빨간 수첩을 일괄 구입하여 배부하여 주었다. 40년을 연중행사처럼 수첩을 배부 받다가 2017년 올해부터 수첩 나눔을 하지 않았다. 수첩에 글씨를 쓰는 것 보다 스마트폰에 메모를 저장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수첩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앞으로 수첩은 사장(死藏)되어 가는 것에 꼽힐 듯하다.
사장(死藏)되어 가는 것이 어디 수첩뿐이겠는가?
나이 먹은 나도 사장(死藏)되어 가는 것을 나날이 느끼고 있다. 옛날에 친정어머니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사라비아’로 발음하시는 것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시지 않아 영어 발음을 못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시쳇말로 대학물 좀 먹었다는 나도 요즘 못 알아듣는 외국말이 너무 많아 쩔쩔 맨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는데, 다양한 메뉴의 이름이 거의 외국어이다.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소스를 주문하는데 소스 이름도 외국어이다. 열 개 이상의 소스 중 1-2개를 주문하는데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 난감하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손가락 힘도 없다. 비닐봉지를 묶은 매듭이 안 풀리고 캔 두껑 열기가 힘들다. 작은 둠벙을 건너뛰기가 무섭고, 미끄러운 길은 겁부터 나서 제대로 걷지를 못 한다.
사장(死藏)되어 가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우리 모두 태어나고, 자라지만 병이 들고 늙어 죽음에 이른다.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이리라. 허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한 것은 이제 주위에 있는 아픈 사람과 외로운 사람을 바라보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기억력이 떨어진 것은 아는 체 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리라.
- 2017년 1월26일 목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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