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2월22일 수요일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백리향 5장


[매묵]2017년 2월22일 수요일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 전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본디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으니,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원로들에게, 하느님의 양 떼를 잘 돌보아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영광의 화관을 받으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 베드로 사도에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인 원로>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5,1-4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저희가 복된 베드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으니, 이 구원의 잔치가 저희에게 일치와 평화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베드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저승의 세력도 이길 수 없도록 교회를 이끌어 주실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희망한 하느님께서 내가 죄인이고 나약하지만 언젠가는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 믿어 왔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내 눈앞에 생생하게 그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보여 주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과연 이 고백은 인간적인 약점 투성이였던 베드로가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자신의 확신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은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한 의지로 산다 해도, 악의 유혹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자비와 은사로 세워진 하느님 백성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는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만과 위선으로 남들에게 잘난 체하는 사람, 수시로 말을 바꾸며 변명만 하는 사람, 가정은 돌보지 않고 교회 봉사만 하는 사람,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교회에서 인맥만 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회심한 베드로는 말합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시편 저자의 기도가 우리 삶을 이끌 때,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그에게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신비, 곧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베드로 안에는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이 “하늘에서” 알려주신 것일 뿐만 아니라, “매고 푸는” 권한을 이제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진 것입니다.(이영근 신부)

2.  럭비공 같은 성격에다 ‘허당’ 기질이 다분했던 그 결점 투성이요 허점 투성이였던 그가 반석이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충우돌을 반복하던 베드로, 옛 습관을 쉽게 고치지 못했던 그, 그렇게 어리석고 아둔했던 그, 마침내 스승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그였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음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나로구나! 주님의 도움 없이는 나는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수 없는 존재로구나!주님을 떠나 사는 그 순간이 지옥이요 멸망이로구나!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주님 밖에 없구나!’ 그 절절한 깨달음과 정화의  과정을 통과한 베드로 사도는 그제야 진정한 수제자, 든든한 반석으로 듭나게 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3.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긴다고 하셨고,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치셨고, 닭이 울기 전에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 사도의 배반을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물고기를 많이 잡아 주신 예수님을 두려워했었고, 죄인인 자신을 떠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모습은 베드로 사도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고, 용기를 얻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도 하였습니다. 그릇된 신념으로 이교도를 단죄하였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서서 이성의 빛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4.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다.’ 신앙은 인간의 살과 피를 위한 소원성취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6세기 교회가 분열되어 개신교회들이 출현하면서 가톨릭교회는 이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있는 가톨릭교회만이 예수님이 세운 교회라는 주장입니다. 그 반면, 개신교회들은 이 복음 말씀에 나오는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개신교회들과 가톨릭교회는 이 문제로 더 이상 다투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에 속하는 성서학자들이 모두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교회를 창립한다는 선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서에만 있습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시리아의 교회는 베드로 사도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베드로를 신앙인의 대명사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에서도 마태오복음서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14, 22-33). 신앙인은 어두움과 고통의 심연 위를 예수님의 말씀 따라 걷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있은 다음, 예수님이 교회 설립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정체성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며,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는 실천들이 발생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 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듯이, 우리도 그분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가 가르치던 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면, 의인이 되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인간 죄에 대해 하느님이 주시는 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결국 유대교는 이 세상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살과 피’, 곧 우리의 이야기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호칭에는 인간 생명의 은혜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家父長) 사회였던 그 시대,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감사로부터 신앙이 시작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과거의 사실을 자주 언급하고, 해방절을 해마다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은 그 사건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은혜로운 분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기도 은혜로움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 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실천하지 않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성서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가서 하느님만 생각하며 살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마르 10, 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유치하게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부모를 신뢰하고 따르듯이, 하느님 앞에 우리도 믿음과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 앞에서 우월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어떤 구실로도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지고 행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가 행복하고”(루가 6, 20)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 43)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로 우월감을 찾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5. 인간은 본래 약합니다. 회개한 것 같아도 아주 잠시 동안만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다가 금세 그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혼과 육의 유혹에 넘어가 본질을 잊는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인정하고 돌아올 줄 아는 게 또 인간이며 그런 행동을 반본 환원이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빨리 반본 환원할 수 있느냐의 차이가 성인과 속인의 차이입니다. 속인들은 자신이 본질을 놓쳤다는 걸 알면서도 본래로 되돌아가는 걸 주저합니다. 오히려 그런 걸 기회로 자포자기 하는 쪽으로, 더 나쁜 쪽으로 움직입니다. 성인들은 자기의 죄성을 금세 인정하고 본성으로 되돌아오려고 힘씁니다. 죄의 고백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속인들은 오히려 죄를 감추려 듭니다. 죄를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고백을 부끄러워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신 이유가 인간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 죄성을 고백하고 반본 환원하라는 것이며, 그런 모습을 통해 이웃 사람들의 영을 각성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나 같은 중죄인이 회개하여 주님께 용서받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 인류 공동체가 회개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행복하다는 단어는 마태오복음서 53~10절 진복팔단에서 나오는 ‘makarioi’의 단수형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진복팔단의 상태에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며, 가난한 자는 매순간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심했을 때 나오는 고백이기에 가난을 실천하는 첫 걸음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베드로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온 천하에 드러내면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죄지은 것보다 자기 죄를 감추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서로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는 공동체입니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교회가 공기를 훔치는 사람들모임이 되었으면 온 세상이 더욱 시원하게 변할 것입니다.(윤경재 요셉)


 6.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6,18) 하십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며, ‘교회’ 또한 어떤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다교 회당과 구별되는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한데 모으려고 하셨지 특정 집단을 형성하여 조직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를 정하신 것으로 알아듣는 건 무리인 셈이지요. 이 구절은 조직과 제도의 관점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교회가 예수님의 모범을 이어갈 소명이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9)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은 구원을 결정할 권한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보잘것없는 그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로 불린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우리의 인간적, 신앙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각자가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주도권에 자신을 맡길 때 공동체와 더불어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요.

또한 교회 공동체를 섬기도록 불린 봉사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그리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지 말고 열성으로 돌보며,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1베드 5,2-3) 오늘도 나를 깨우쳐주시는 성령께 자신을 내맡기고 주님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참 교회가 되는 행복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2017년 2월22일 수요일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한 의지로 산다 해도, 악의 유혹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자비와 은사로 세워진 하느님 백성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진복팔단의 상태에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며, 가난한 자는 매순간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심했을 때 나오는 고백이기에 가난을 실천하는 첫 걸음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베드로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온 천하에 드러내면서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죄지은 것보다 자기 죄를 감추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서로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는 공동체입니다.


아멘...수산나 -



백리향 1


백리향 2


백리향 3


백리향 4


백리향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