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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2월24일 [(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매일미사 묵상/졸참나무 4장


[매묵]2017년 2월24일 [(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고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간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냐고 묻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6,5-17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자신보다 상대를 더 많이 생각하고 보살핍니다. 사랑은 두 인격이 서로를 향한 온전한 헌신을 통해 서로를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이혼장만 써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부당한 관습에 대하여 제동을 거시면서 혼인에 대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필요에 의해 결합되고 헤어지는 흔한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악과 불륜을 저질러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혼인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께서 살아 계시고, 두 사람을 혼인의 유대로 결합시켜 주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혼인은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이 파기되지 않듯이, 사랑하는 남녀가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은총으로 ‘둘이 한 몸’이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갈라져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류와 맺으신 계약에 대한 신뢰를 지키시듯이, 혼인 역시 서로 부족한 인간끼리 사랑하며 성숙해져 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성숙한 부부는 욕망이 아니라, 우정과 신뢰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라는 집회서의 말씀대로, 내 인생의 반려자가 나의 든든한 피난처가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혼인 서약을 끝까지 지켜 주는 성실한 친구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보물을 얻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곁에 나는 참된 보물을 두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무능하심으로 전능하심을 드러내시는 주님,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드리오니
저희가 마음과 감정의 기복을 잠잠하게 하고 판단하려는 마음과 분별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여, 
만나는 사람 누구나 다 보는 사람 누구나 다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연민하며 좋아하게 해 주소서.


2. “나는 팔십 육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겼으나 주는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신 일이 없으니, 
나를 구원하신 내 주 임금님을 어떻게 모욕하리요.”

어제 성 뽈리까르보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저녁 성무일도 후렴때 노래한 성인의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인의 주님과의 항구한 우정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주님과의 우정이 인간상호간의 참된 우정의 기초입니다. 
주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이웃과의 우정입니다. 

다음 칼릴 지브란의 고백이 또 감동입니다.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것 외에 어떤 목적도
 결코 우정 위에 두지 마라.
 자신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사귐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에.
 그것은 다만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던져진 그물
 오직 무익한 것만이 걸려드는 덫일 뿐이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친구와 관련된 고사 중에는 관포지교가 있습니다. 친구의 부끄러움을 보듬어주고, 친구의 잘못을 이해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기꺼이 감옥에도 가고,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뜨거운 우정을 보여 줍니다. 친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그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편한 우정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까지도 맡길 수 있는 우정입니다.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한다면 유안진 선생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입니다. 상큼한 글로 친구의 우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은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그가 여성이여도 좋고 남성이여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좋겠다.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동창 신부님들 중에 거동이 불편한 친구,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친구, 잠시 쉬는 친구가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친구들의 근황을 접하게 됩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바빠서인지 특별히 날을 잡지 않으면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기도 하고, 다들 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관포지교의 우정을 나눌 만큼 수양을 쌓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그 사람을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일상의 삶에서 지란지교를 꿈꿀 수 있는 것도 행복일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씨는 친구들을 많게 하고, 우아한 말은 정중한 인사를 많이 받게 한다. 원수로 변하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너의 수치스러운 말다툼을 폭로하리라. 식탁의 친교나 즐기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조재형 신부)


4. 이런 바리사이 정신의 단점은 다른데서 나타납니다. 율법 조문에 매달리다 보니 율법에 미처 기록되지 않은 일들은 양심과 도덕에 어긋나도 아무런 죄의식이 들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소박 율법이 그렇습니다. 모세가 지은 율법에 따라 이혼장만 써주면 소박하는 데에 제한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남편이 생각하기에 부인이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대접하거나 가정생활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면 이혼장을 써주고 소박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자기 부인보다 예쁜 여인을 만나고서 본처가 못생겼다는 이유를 들어 소박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개념으로 보아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벌였습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24,1)
 
신명기 24,1절 해석을 두고 율법학자들 사이에서 샴마이학파와 힐렐학파는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샴마이학파는 이 규정을 제한적으로 해석했으나, 힐렐학파는 부인이 1,간음했거나 2,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남편은 일방적으로 이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다만 혼인계약서에 작성된 이혼금을 지불해야 했기에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혼장을 함부로 쓸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돈만 있다면 남자는 별의별 핑계를 붙여서라도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다처제도 허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에 따라 죄를 판정하면 언제나 경우의 법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이럴 경우는 죄이고, 저럴 경우는 죄가 아니라고 인간 스스로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 신성 영역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금기(타부)를 정해 놓고 사람들을 옭아맨다는 말입니다. 모두 인간이 죄를 판단한 탓입니다.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무척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친척과 자녀가 없는 과부나 이혼녀는 그야말로 노예와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성이 자녀를 못 낳는 것은 하느님의 형벌로 간주되었습니다.
 
심지어 여성은 율법을 지킬 의무도 없었습니다. 월경에서 벗어난 정결의 날 전, 출산 후 40일 또는 80일 동안은 성전에서 이방인의 뜰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재판에서 증언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인격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는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께서는 여성에게 제자가 되는 것까지 허용하셨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관습을 탈바꿈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여성을 존중받아 마땅한 한 인격체로 대접하신 사례가 나옵니다. 여인을 남자와 동등한 지위로 올려놓으셨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5,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21,31~32)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7,37~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10,38~39)
 
또한 오늘 복음말씀처럼 남녀 간의 결혼을 신성하게 여기시고 일부일처제를 찬성하셨습니다. 이혼을 금지하며 토라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결혼을 하느님의 창조질서의 본보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윤경재 요셉)

5. 예수님 시대에 율사들은 아내가 풍기문란, 남편이 먹을 음식을 태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과 같은 “수치스러운 일”(신명 24,1)이 있으면, 남편이 간단한 소박장 하나로 소박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인격적인 이혼을 비판하시면서, 결혼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재확인시켜 주십니다(10,6-9).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시어”(창세 2,24) 서로 변함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을 심어 주셨습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하느님께서 육화 안에서 인간과 결합하시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오리게네스). 따라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0,9)고 하십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6.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계약은 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계약을 나약함 속에서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평화를 만드셨지만 그러나 그 평화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해야 하는 과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안에 원죄의 씨앗, 다시 말하자면 카인의 영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 질투, 시샘, 탐욕 그리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전쟁으로 이끕니다.”

2017년 2월24일 [(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이혼장만 써 주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부당한 관습에 대하여 제동을 거시면서 혼인에 대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혼인은 하느님과 인류가 맺은 계약이 파기되지 않듯이, 사랑하는 남녀가 하느님이 맺어 주신 은총으로 ‘둘이 한 몸’이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갈라져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류와 맺으신 계약에 대한 신뢰를 지키시듯이, 혼인 역시 서로 부족한 인간끼리 사랑하며 성숙해져 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성숙한 부부는 욕망이 아니라, 우정과 신뢰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라는 집회서의 말씀대로,
내 인생의 반려자가 나의 든든한 피난처가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혼인 서약을 끝까지 지켜 주는 성실한 친구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보물을 얻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곁에 나는 참된 보물을 두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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