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2월23일 목요일 [(홍)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 전례
폴리카르포는 요한 사도의 제자로, 스미르나 곧 오늘날 터키 이즈미르 지역의 주교였다. 그는 특히 정통 교리의 열렬한 수호자로 여러 이단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이교적 교리에 심취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 체포되어 166년경 순교하였다. 폴리카르포 주교는 사도 시대와 이후의 교회를 연결하는 위대한 기록자이자, 2세기 그리스도교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본기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복된 폴리카르포 주교를 순교자 대열에 들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수난의 잔을 나누어 마시고,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지만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말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네 손이나 발이나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잘라 버리라며, 두 손이나 발이나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기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마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5,1-8
복음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1-50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저희에게 굳센 정신을 심어 주시어, 저희가 복된 폴리카르포처럼 언제나 주님을 충실히 섬기며, 온갖 고난을 꿋꿋이 이겨 내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냉정하고 가혹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 닥칠 책임을 예수님께서는 충격 요법까지 쓰시면서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손과 발, 눈이 나를 죄짓게 하거든 가차 없이 잘라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예 죄를 지을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훈계입니다. 우리도 간혹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과장된 표현을 쓰듯이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유혹에 빠졌을 때 겪게 될 고통을 미리 알고 계셨나 봅니다.
집회서는 우리가 겪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너 자신과 네 힘을 붙좇지 말고,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마라.” 능력 중심의 시대, 욕망의 사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속죄를 과신하지 마라.”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남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만 하느님의 자비를 남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려 하지 마라.”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기고,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더 자유롭다고 말하는 냉소적인 이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재산을 모으기만 하고 나누지 못하는 이들이 말년에 겪는 자녀들의 재산 다툼, 평생 돈 모으느라 삶의 기쁨도 잊은 채 병원비로 재산을 날리는 이들, 망나니로 키운 자녀들 뒤치다꺼리로 재산을 탕진한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경고는 전달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이런 훈계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다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야 뒤늦게 깨닫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음에 담은 소금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나만 잘살겠다고 평생 남을 외면하다 보면, 훗날 하느님을 마주 뵐 때 무슨 말씀을 드릴 것인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손, 발, 눈의 일차적 목적은 주님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하늘 향해 주님께 기도하라 있는 손이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 있는 발이요,
주님의 좋으심과 아름다움을 보라 있는 눈입니다.
하루 아침에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선행이 축적되어 제2천성이 될 때 착한 사람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 경주 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순히 재산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가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당쟁에 얽히지 말라는 뜻)
2.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욕심을 부리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라는 뜻)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인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말라는 뜻)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가진 자로서 없는 자를 착취하지 말라는 뜻)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검소, 절약하라는 뜻)
6.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상부상조하라는 뜻 )
이런 가훈이 있었기에 400년 이상 지역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부유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끝까지 나와 함께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몸은 땅에 묻히면 그만입니다. 재산은 그 땅에 묻힐 때 함께 하지 못합니다. 가족들은 땅에 묻히는 곳까지만 함께 해 줍니다.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 합니다. 착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 나누는 마음, 겸손한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길에 버려 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람은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으며, 많은 것들을 만들고 발명하였습니다. 사람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또한 비참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못 먹어서 병들기도 하지만 너무 먹어서 병들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질투 때문에 서로 싸우기도 하고, 애써 만들어온 모든 것들을 스스로 파괴하기도 합니다.
오늘 화답송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로서 의미 있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지금 당장 즐거운 쾌락에 빠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존재로서 의미 있게 살기를 바라십니다.(조재형 신부)
3.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과 어우러져야 하며 그 속에서 더욱 더 빛을 발하며 맛을 내야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그들이 지닌 인간성의 본질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제 에고의 뻣뻣함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금 절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물론 불륜을 저지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들, 그리고 강도들이나 우상 숭배자들과 전혀 상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아예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1고린5,10)
춘추시대 노나라 재판관(옥관)이었던 유하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작은 벼슬이라고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관직에 나아가면 능력껏 소신대로 이를 처리해 나갔습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임금에게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의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종종 “나는 나, 너는 너다, 네가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한들 자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고 맹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에게 실제로 닥쳤습니다. “유하혜가 어느 때 먼 길을 다녀오느라 늦어서 성문 밖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갑자기 한 여자가 와서 잘 곳이 없으니 같이 자게 해달라고 했다. 유하혜는 얼어 죽을 것 같은 그 여인을 품에 안고 옷으로 덮어주었다. 새벽에 이르기까지 난잡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평전은 전합니다. 그들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는데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즐거워하는 법이 없었고 낮은 지위에 앉았다 해서 원망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가 재판관직에서 옳은 말만하다가 세 번씩이나 면직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왜 다른 나라로 떠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를 곧게해서 임금을 섬긴다면 어느 나라에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겠소? 하고 반문하며 자신의 행동을 지켰습니다. 그는 늘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결 같은 道를 베풀었습니다. 어떤 상황에 닥쳤어도 유하혜는 화합과 조화를 이끌며 자신의 철학인 道를 지켜냈습니다. 道를 지키는 것은 에고의 고집이 아닙니다. 오히려 에고가 무너져야 비로소 드러나는 밝은 덕입니다. 大學에서는 이러한 것을 하늘이 주신 ‘明德’을 밝히는 일이라 했습니다. ‘明德’은 ‘인간의 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논어 미자편에서 자신을 지키면서도 타인에게 어짐을 베푸는 유하혜의 태도를 높이 평가했으며, 맹자는 그를 ‘조화를 이룬 성인(和聖)’에 속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에고의 욕망에 따르지 않고 자기의 道에 충실한 것을 높이 산 것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절인 사람은 혼과 육인 에고가 사라져 나와 남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결국 나와 남이 하나로 합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나를 주장하거나 또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이롭게 해 줄 방법을 찾아냅니다. 자신에게도 이롭고 남도 유익하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외통수 길’을 찾아내어 뚜벅뚜벅 걸을 수 있게 만듭니다. (윤경재 요셉)
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고 살아가면서도, 서로 서열다툼을 하며 자기만 인정받고 남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빠져서는 안 됨을 가르칩니다. 제자공동체는 제아무리 보잘것없다 하여도 서로 선을 행하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9,4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한 듯 보이고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께서 내 마음에 심어주시는 거룩한 애정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무관하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선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고, 공유하고, 되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이나 권력, 재능을 많이 지니지 않아도, 나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나눠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불린 사람들끼리 경쟁하고 차별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이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9,42) 여기서 작은 이는 보잘것없지만 예수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 하느님 앞에서 낮아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는커녕 하느님의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남을 죄짓게 하는 손과 발, 눈은 제거해버리라고 하시며, 그들은 지옥에서 모두 소금에 절여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9,43-49 참조). 이 충격적인 말씀들은 심판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강력한 구원의 초대이지요. 신체 훼손을 명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부추기는 욕망을 철저히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모두가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고귀하고 존엄한 형제자매들입니다. 따라서 부족하고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고 별 능력이 없다고 해도 서로를 업신여기지 말고 죄짓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린 채, 형제를 업신여기고 경쟁 대상으로 삼으며, 시기 질투로 형제자매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되겠지요. 나아가 육체적 감각과 눈길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함으로써 형제자매를 죄에 떨어지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며, 이 세상에서 정의의 강물이 넘쳐흐르게 해야 할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재산을 믿지 말고, 자신과 자신의 힘을 붙좇지 말며,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말아야겠습니다.”(집회 5,1-2) 세속의 정신으로 자리다툼을 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하며, 사업을 통한 이윤 추구에 눈이 멀어,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오늘도 거룩한 애정으로 선을 나누고 되돌리는 선행의 소금, 경쟁과 시기 질투를 버린 순수한 상호간의 사랑의 소금, 희생의 소금을 간직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아름다운 제자공동체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2017년 2월23일 목요일 [(홍)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복음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음에 담은 소금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나만 잘살겠다고 평생 남을 외면하다 보면, 훗날 하느님을 마주 뵐 때 무슨 말씀을 드릴 것인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손, 발, 눈의 일차적 목적은 주님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하늘 향해 주님께 기도하라 있는 손이요,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 있는 발이요,
주님의 좋으심과 아름다움을 보라 있는 눈입니다.
하루 아침에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선행이 축적되어 제2천성이 될 때 착한 사람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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