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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3월16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 /왕자귀나무 5장


[매묵]2017년 3월16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니, 저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놓으시어, 굳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며, 주님께서는 마음을 살피시며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으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호화롭게 살다 죽어서 저승에 간 부자와 아브라함 곁으로 간 가난한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복음).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의 힘으로 저희가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반대로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지요.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지만,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이 부자라는 이유로 벌을 받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의 죄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생전에 그 가련한 라자로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요. 물론 그가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남의 어려움을 외면한 이기적인 사람을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 이런 외적인 상태보다도 ‘얼마나 마음이 풍요로우냐?’ 이 점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복음에 나오는 그 부자는 오늘날 누구인가?’ 이 점을 오늘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재산이 많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이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복음의 부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이웃과 거리를 두게 마련입니다. 이웃과의 사이에 스스로 구덩이를 파는 것이지요. 이 구덩이가 점점 크고 깊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이웃은 물론이고, 하느님께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때가 더 늦기 전에 나눔과 배려의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모든 사람을 다 아시는 예수님, (요한 2,24 참조)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드리오니
저희가 주님의 일을 한다며 함부로 나서지 않고 
주님께서 손수 다 하시며 이끌어 주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며 고요히 머물게 해주소서.

2. 활짝 열려 있는 관계의 자리, 바로 거기가 천국입니다. 하느님께, 이웃에게, 자기에게, 자연에게 활짝 열려있어 날로 깊어가는 사랑의 관계속에 살아갈 때 거기가 하늘나라입니다. 천국은 장소개념이 아니라 관계개념입니다. 

라자로는 이름이 있지만 부자는 이름도 없습니다. 바로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무의미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자기를 잊고 살아가는 자기가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 바로 여기가 지옥입니다. 밖은 화려하고 밝아보여도 내면은 무의미와 허무의 어둠 가득한 지옥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예레17,5-6).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레17,9-10)(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교황님께서는 사순시기 담화문에서 부자와 라자로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연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료보험료를 지급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런 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준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듯이, 우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로 알고 잘 도와 드리고,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몇 년째 아파서 누워계시는 가족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직장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자녀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3수를 하는 아들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원망하고, 무시하고, 짐으로 여기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무척 서운해 하실 것입니다. 감싸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4. 이 부자는 처음부터 영원히 자기는 부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가 아닐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현세에서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자로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영원한 타자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심리학에서 수퍼 에고라고 부르는 억압된 도덕관념과 인칭적 자아가 결합될 때입니다. 수퍼 에고는 우리 안에서 감시자 역할을 합니다. “~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면 ~해야 한다. ~한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마라.” 등등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따져 묻지 않고, 자동인형처럼 처신하기를 바라는 심리적 감시자 역할을 우리 스스로 세우면서 살아갑니다. 수퍼 에고가 공동체 질서를 지키고 개인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해로운 점은 우리에게 이유도 없는 죄의식을 심어준다는데 있습니다. 게다가 남에게까지 자신의 수퍼 에고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라고 강요합니다.

 

수퍼 에고와 인칭적 자아가 결합하면 나는 ~한 나이다.’라는 관념이 고착되어 자신을 벽에 가두게 하고 남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실패나 불화에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 모든 일을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거기에 안 맞는 것에 대해선 싫어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세상이 모두 자기 생각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셈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지탄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행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의 근원은 ‘구별된 자’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켜 죄로부터 구별된 자라는 자의식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그럴만한 이유 여하를 떠나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들 생각에 죄인들은 현세에서 그리고 죽어서도 갖은 불행과 고난, 가난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죄인들 태도와 삶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죄인들과는 교류해서도 안 되고 구별하여 마땅한 것입니다.


흔히 심리학을 잘못 이해한 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사람들은 ‘수퍼 에고’를 하느님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퍼 에고’는 인간이 만든 신입니다. 가짜이며 우상입니다. 아빠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지, 징벌하고 억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편 가르기를 하시지 않습니다. (윤경재 요셉)


5. 극도의 비참과 가난한 처지에서 오직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했던 라자로와 달리 부자는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겨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예레 17,5)


오늘도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우상에 빠지지 않으며,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만을 갈망하는 가난한 발걸음이었으면 합니다. 따뜻한 사랑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나눔으로써 더불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무는 우리가 되도록 힘써야겠지요.(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6. 가난한 라자로는 누구인가?
가난한 라자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가난한 라자로인 예수님은 부자인 인간의 문 앞에 버려져 있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가난한 모습으로 와 계신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인 눈을 가난한 이에게 돌리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있으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 35-40)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물 한 잔도 청하지 않으셨고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 아니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까지도 인간을 위해서 다 흘리셨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철저하게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이 지상의 생활하시는 동안에도 가난한 삶을 사셨고 죽으실 때에도 몸에 걸쳤던 옷까지도 다 벗기우신 채 가난한 죽음을 맞으셨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옵니다."라고 끝까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그 순간에도 당신의 죽음을 걱정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죽어 가는 왼쪽에 있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2017년 3월16일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가난한 라자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가난한 라자로인 예수님은 부자인 인간의 문 앞에 버려져 있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가난한 모습으로 와 계신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날마다 호화롭게 살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인 눈을 가난한 이에게 돌리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져 있으시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이방인이었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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