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3월18일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영광스러운 이 성사로, 세상에 사는 저희가 천상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도록, 저희의 삶을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하느님께 당신 소유인 남은 자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용서하시고 옛날처럼 자애를 베풀어 달라고 청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에게, 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맞아들이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4-15.18-20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ㄴ-32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그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여,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재산을 분배받아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한 생활 끝에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따뜻이 맞아들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위하여 잔치까지 벌이는 것을 보고는 화를 냅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했다고 항변하지요. 그런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것을 상기시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작은아들은 집을 나가 방황 끝에 비로소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 깨달았습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값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몸은 아버지 집에서 살았지만, 마음은 종살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얽어맨 것이지요.
큰아들도 마음으로는 작은아들처럼 세속의 재미를 듬뿍 즐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큰아들은 겉으로만 보면 집 안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잘 섬기고 충실하게 일하는 효자이지요.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작은아들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단지, 하나는 집을 떠났다가 깨달음을 얻은 탕자이고, 다른 하나는 집 안에 있으면서도 깨우치지 못한 탕자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우리 역시 몸은 주님의 집인 성전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저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밖에서 방황했던 작은아들보다, 집에 있으면서 내적으로 방황하는 큰아들에게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우리가 궁극의 돌아갈 곳은, 궁극의 기다리는 분은 두말할 것 없이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추상적인 철학의 하느님이 아니라 오늘 복음 같은 따뜻한 품을 지닌 인격적 아버지입니다.
바로 미카 예언자가 고백하는, 기도하는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우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미카7,18ㄴ-20).
어찌보면 우리는 대부분 큰 아들일 수도 있고, 작은 아들일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회개의 절실성을 보여줍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는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사셨던 롤모델인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회개하여 돌아갈 곳, 기다리는 분,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거점인 자비하신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로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와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자비로운 삶, 품위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 목이 마른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심하게 항의한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물이 터져 나오도록 호렙의 바위를 친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주님을 시비하고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다. 마싸는 '시험', 므리바는 '다툼'을 뜻한다(제1독서).
3. 성서를 보면 이런 사가지(인의예지)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은 형제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으니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고, 그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했으니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잡혀가는 스승을 위해서 함께 하지 못하였고, 도망을 갔습니다. 정의롭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었던 ‘돌아온 아들’도 역시 사가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였고,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였습니다. 부끄러움도 몰랐고, 예의도 없었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였고,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카인은 자신의 죄가 크지만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머슴으로라도 살겠다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성서는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기만 하면,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진흥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고,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큰 아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의 잣대로 규정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4. 오늘 복음의 돌아온 탕자, 그는 아버지의 연민을 알았다. 이 극적인 사랑을 누리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용서를 해야 한다. 죄책감이 우리를 기진맥진 하게 만들거나 낙담케 하거나 침울케 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반석 베드로도 그랬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이것을 통해 베드로가 체험한 비참한 추락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리웃 유다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고 절망했고 베드로는 자신을 인정하고 돌아왔다. 이것이 겸손이다. 그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겸손되이 자신을 낮추면서 “예수님, 저는 또다시 죄를 짓고야 말았습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다시 일어나 계속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발견하면 모든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순수함과 순결함을 다시 찾을 수 있다.(김연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5.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한창 잘 나가던 위치에서 갑작스런 몰락을 체험했습니다. 부인과 아들을 잃고 병까지 얻었으며, 전 재산을 잃어 파산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런 밑바닥의 체험을 녹여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죽음과 가까울 정도로 고통의 심연 속에서 그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탕자와 동일시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네덜란드 출신 헨리 나우엔 신부가 지은 책이 절창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잘 나가던 교수이며 심리학 박사였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고 회심하여 가톨릭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림에서 아버지의 양손을 감동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양손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손은 거칠고 투박하며 남성적 힘이 느껴집니다. 다시는 너를 놓치지 않겠다는 표현이 드러납니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세련되고, 부드럽고, 대단히 다정합니다. 우아한 분위기가 납니다. 아들의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어머니의 손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두 명의 방관자와 세 명의 가족입니다. 가장 크고 뚜렷하며 당당한 자세를 지닌 큰 아들, 그는 붉은 망토를 걸친 채 사태를 거리를 두고 바라봅니다. 허리는 움츠러들고 두 눈은 초점을 잃어 사시 같은 느낌을 주는 아버지, 그러나 그의 양손은 빛의 조명을 받아 관객의 시선을 모아줍니다. 작은아들은 머리는 빡빡 깎아 죄수와 같고 옷은 홑겹에 잠옷처럼 남루하고 헤졌습니다. 무릎을 꿇은 발에는 낡은 슬리퍼마저 벗겨졌습니다. 두상은 핏줄이 선명하여 간난아이처럼 보입니다. 새로 탄생하였다는 상징이 나타납니다. 기둥 옆에 숨듯 서있는 여자는 세상을 떠난 셋째 부인을 그렸을 것이라 합니다. 거들먹거리며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은 죄인인 세리를 비유했다고 합니다. 시기와 질투, 단죄를 바라는 심정을 그렸습니다. 왼쪽 상단 구석에는 죽은 첫째 부인의 혼을 흐릿하게 그려놓아 돌아온 자기 아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을 찾지 않고 잃었다가 방황하던 작은아들을 늙어 지친 아버지는 양손을 벌려 따뜻하고 힘차게 맞아줍니다. 그 양손의 온기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전달되고 이제부터 온전히 보존될 것입니다. 말에서 내려 달려온 길을 되돌이켜 보았을 때 집에 버려두고 온 줄 알았던 영혼이 어느새 그를 따라잡은 것이었습니다. (윤경재 요셉)
6. 오늘도 하느님 자비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냉정함과 모진 마음, 무관심한 눈길을 떨쳐버려야겠습니다. 하느님 자비를 갈망하며, 다른 이들이 못마땅하고, 때로는 엄청난 실망감을 안기고 상처를 준다 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사랑에 배고프고 사랑 없인 살 수 없는 까닭입니다. 내 마음은 작은 아들도 큰 아들도 받아들이는, 따뜻하고 푸근한 자비의 집입니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7. 어떤 분께서 “떠나라”라는 말을 자신의 모토로 삼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집을 떠나서 여행을 자주 다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나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어쩌면 익숙한 것으로부터 과감하게 떠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요?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당신은 옳은 삶을 살 것이다.(스티브 잡스)
8. 이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이영근 신부)
9.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아버지, 나의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품어주시기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반영억 라파엘 신부)
10. 돌아온 탕자를 꼭 끌어안고 놓을 줄을 모르시는 아버지의 행복한 얼굴은 또 다른 한 가지 불멸의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우리의 귀환만이 중요하지 지난 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아버지, 미래지향적 아버지십니다.”(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17년 3월18일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어찌보면 우리는 대부분 큰 아들일 수도 있고, 작은 아들일 수도 있고, 둘 다 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회개의 절실성을 보여줍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는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돌아온 탕자, 그는 아버지의 연민을 알았다. 이 극적인 사랑을 누리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용서를 해야 한다. 죄책감이 우리를 기진맥진 하게 만들거나 낙담케 하거나 침울케 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저는 또다시 죄를 짓고야 말았습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다시 일어나 계속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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