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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3월 27일 수요일[(자) 성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27일 수요일[(자) 성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필리 2,8.10.11 참조
주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니,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네.

본기도

하느님,
성자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에게 부활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9(68),8-10.21-22.31과 33-34(◎ 14ㄴㄷ 참조)
◎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나이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 ◎
○ 제 마음이 모욕으로 바수어져, 저는 절망에 빠졌나이다. 동정을 바랐건만 헛되었고, 위로해 줄 이도 찾지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저에게 먹으라 쓸개를 주고, 목마를 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나이다. ◎
○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

복음 환호송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만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나이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봉헌하는 이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이 제사로 성자의 수난을 신비로이 기념하고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2 : 수난의 승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이 가까이 왔나이다.
옛 원수의 교만을 꺾어 승리한 구원의 성사를
새롭게 거행하는 축제가 다가왔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이 거룩한 신비로 선포하는 성자의 죽음을 통하여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을 믿는 이들이 끊임없이 파스카 성사에 참여하고
다가오는 축제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새로 태어난 그 신비를 언제나 간직하여
그 신비의 힘으로 새로운 삶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주간 수요일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대화의 소재가 끊어지면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일까요? 맞습니다. ‘군대이야기입니다. 저는 1986 1 30일에 논산훈련소 25연대 8중대로 입소했습니다. 신학교 학부 졸업식에는 참석 못했습니다. 다행이 동창 신학생이 저의 졸업장을 대신 받아 주었습니다. ‘희비쌍곡선이 있듯이 저의 군 생활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는 과정에서 저는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인사 담당관의 아들이 신학생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종병으로 성당에서 지내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합법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고, 성당이 외부에 있었기에 합법적으로 외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저는 3개월 만에 다른 부서로 가야 했습니다. 이유는 제가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잔디도 깎고, 성당도 청소하고, 화장실도 청소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잘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부님께서 출장 가시면서 부대에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 지시사항을 어겼습니다. 저는 다른 부서에서 지내면서 오히려 신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를 엄하게 대하셨기에 저는 군생활을 무사히 잘 마치고 신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말년 병장 때입니다. 일석점호를 준비하면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낮에 저는 일직사관과 장기를 두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본청 일직사령이 순찰을 돌면서 저희 내무반이 시끄럽다고 하셨고, 일직사관이 와서 조용히 일석점호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일직사관에게 인사하는 과정에서 그만 본의 아니게 충돌이 있었고, 치아가 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서울로 와서 치료를 받았고, 그 뒤로 크라운을 씌었습니다. 어느덧 37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몇 번 크라운을 교체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큰 무리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저의 동기 중에는 특수병과들이 있었습니다. 참모식당에서 근무하는 요리병, 테니스장에서 근무하는 테니스병, 사령관 실에서 근무하는 번역병, 표창장과 상장을 쓰는 모필병, 저는 성당에서 일하는 군종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각자의 자리가 힘에 겨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 돕고 지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 저는 동기들보다 3개월 먼저 1988 5 4일에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습니다.

 

지난 2 14일에 시작한 사순시기도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시기이지만 2024년 사순시기는 제게 특별한 사순시기가 되었습니다. 본당을 떠난 지 12년 만에 다시 본당신부가 되어서 사순시기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에 교회는 4가지를 권고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절제와 회개의 의미로 단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들 또한 희생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행을 베푸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특강을 마련하였고, 매주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사순 제1주일에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2 주일에 우리는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3주일 우리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4주일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알았습니다. 사순 제5 주일에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려는 예수님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지난 성지주일에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악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4년 나해 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26,14-25

 

인생이 무대라 여기면 평화의 길이 보인다 

 

무대공포증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면 무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무대에 섰다면

무대공포증을 느끼는 것은 무대를 준비하고 그 위에 나를 세운 누군가를 배신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해주는 역할을 거부한 가리옷 유다는 어떤 심판을 받았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무대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준 역할과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트라우마가 생기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공포에 휩싸여야 합니다.

무대에서는 그곳에 올려준 이의 의도대로 잘할 자신이 없다면 언제나 공포 속에서 올라야 합니다. 

 

가수 보아 씨는 이른 나이에 일본에서 데뷔하게 됩니다. 십 대 중반의 나이에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쇼케이스 무대에서 음 이탈을 몇 번 일으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판의 목소리는 어린 보아를 주눅들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1년씩 늙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만약 무대에 오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노래 부르며 음 이탈을 겪는 것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가 아니라면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심상 죄를 지으면 하늘이 두려워지고 이웃에게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무리 인생이 무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안과 두려움, 긴장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냥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올려진 무대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영화 ‘버드맨’은 20년 전 버드맨이라는 영웅물로 유명했던 한 남자배우가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는 노력을 그렸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연극을 만들었고 다행히 흥행합니다.

그런데 정작 영웅이 되는 것은 연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젊은 배우입니다.

자신도 그 연극에서 인정을 다시 받고 싶지만, 아무도 한물간 배우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의 귓속에서는 이전의 영광이었던 버드맨이 분명 이전의 영광을 다시 얻을 수 있다고 종용합니다.

그는 결국 진짜 권총으로 자기 얼굴을 쏩니다. 연극의 완성을 위해서. 

 

연극은 자기 영광이 아닌 보는 관객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스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발레를 포기한 엄마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만의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타인이 만든 무대에 서든지, 자기가 만든 무대에 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는 자기 무대를 자기가 만들고 버드맨처럼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 하였습니다.

결과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공포에 휩싸여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무대라고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감독이 원하는 배역과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공포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집니다.

 

배우 정유미 씨는 무대공포증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겪고 있습니다.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신들린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서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합니다.

 

대학생 때 연극 대사를 잊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사실 대인공포증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연기할 때는 그런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배역이 주어지고 대사가 주어진다면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충실히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혹시 심판이란 게 있어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그냥 이 무대가 창조되었고 그 창조자가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그대로 한 번 살아봅시다.

 

나쁠 게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만입니다.

내가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사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성주간 수요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녕 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이 먼저 혁명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혁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라고 자비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도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무참할 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를 건져주십시오.”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3.26.성주간 화요일                                                    이사49,1-6 요한13,21ㄴ-33.36-38

                                                        “나는 누구인가?”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37,5)

 

오늘 강론 제목은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요즘 참 절실히 깨닫는 것은 리더인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세계든 나라든 사회든 가정이든 언제 어디서든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리더의 중요함은 더욱 커집니다.

지도자에 따라 공동체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민생입니다.

정말 정치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할 4월10일 총선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중 국가와 권력에 대한 내용을 일부 나눕니다.

 

1.국가권력은 호의와 온유함으로 지배해야 한다.

2.공평과 인내, 친절은 윗사람이 지녀야 할 아주 좋은 자질이다.

3.황제는 교회 위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

4.통치자는 많은 권력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5.세상의 모든 권력은 실재가 아니라 꿈이다.

6.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7.재물은 탐욕으로 이끌고, 권력은 교만으로 이끈다.

 

신자이자 국민인 우리가 알아야할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신자들입니다.

지도자의 영원한 모델 예수님을 참 지도자로 모신 우리임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오늘의 다산 어른과 공자의 말씀도 유익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저울질한다면, 나 또한 인간의 마음을 잃은 도구로 변할 것이다.”-다산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함에도 염구는 많은 세금을 거둬 재산을 더 늘려줬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의 죄를 다스려라.”’-논어

 

성지주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시 군중들의 환호, “호산나!”는 우리 식으로 하면

“하느님 만세! 하느님 찬미!”와 같습니다.

새삼 하루를 시작하면서 제가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바치는 만세육창이 옳았음을 확인합니다.

 

1.하느님 만세!

2.예수님 만세!

3.대한민국-한반도 만세!

4.가톨릭교회 만세!

5.성모님 만세!

6.성 요셉 수도원 만세!(우리가정 만세!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만세육창입니다.

지금은 성주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고 답을 찾는 시기입니다.

 

성주간, 죽음을 예감한 예수님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처절히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역시 나는 누구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참 지도자인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였습니다.

바로 여기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확인하신 예수님이셨고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향유를 부어 주었던 여인도 예수님께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종을 통한 자신의 신원확인이었습니다.

이런면에서 어제 강론 제목은 참 적절했습니다.

 

“주님의 종; 

예수님 사랑하기, 예수님 알기,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

 

주님의 종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영원한 지도자이자 중심이기에 우리의 신원확립에도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 예수님 역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예수님은 배반자의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12제자들중 하나,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임을 지목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애제자에게 슬며시 물어봐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자임을 알려주었고,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습니다. 

 

주님의 빛나는 제자공동체에서 어둠의 멸망을 택한 유다였습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한결같을 수 있었음은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두 번째 노래 덕분이였음을 봅니다.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신원을 발견하고 확인한 예수님이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어찌 주님의 종, 예수님께만 해당되겠습니까?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우리 또한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불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태중교육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이런 진리를 깨달아 안다면 낙태는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고 자녀들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임은 물론 부르심에 적절한 인물로 성장하도록 자녀교육에

기도와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오늘 복음에서 유다의 배반에 이어 베드로의 배반도 예고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베드로의 자만을 여지 없이 꺾어버림으로

장차 회개에로 이끄는 주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참 놀랍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베드로는 물론 모든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고 복잡했을런지요!

예수님은 다음 이사야서의 주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위로와 힘도 받으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예수님뿐 아니라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우리가 신원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상기하여

제자리를 찾게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비로소 구원의 출구를 찾은 예수님의 영적승리의 고백이 감동적이요

이 또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The glory of God is the living person)’,

바로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

베네딕도회의 모토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하라.

 영원히 남으리라,"(시편37,27). 아멘.


3/27(수)  성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지난 2 14일에 시작한 사순시기도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사순 제1주일에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2 주일에 우리는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3주일 우리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4주일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알았습니다. 사순 제5 주일에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려는 예수님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지난 성지주일에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혹은 완고함)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악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조재형 신부)

 

2. 세상 무대가 창조되었고 그 창조자가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그대로 한 번 살아봅시다.

 

나쁠 게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만입니다.

내가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사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전삼용 신부)

 

3.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도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무참할 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를 건져주십시오.”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베드로는 물론 모든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이수철 신부)

 

3/27(수)  성주간 수요일, 459(제89)일 기도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도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무참할 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를 건져주십시오.”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 2024년 3월27일(수) 5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