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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3일 수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3일 수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마태 25,34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뻐하게 하시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내는 축제로
영원한 파스카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5(104),1-2.3-4.6-7.8-9(◎ 3ㄴ)
◎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
○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

부속가

<자유로이 할 수 있다.>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시편 118(117),24
◎ 알렐루야.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알렐루야.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인류를 위하여 바치는 이 속량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이루어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24,35 참조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자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저희가
옛 죄를 깨끗이 씻고 새사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부제 또는 사제가 백성을 향하여 말한다.>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진설명: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헬렌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날. 나는 나에게 친절과 따뜻함, 그리고 우정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 준 사람들을 보고 싶다. 둘째 날, 새벽 여명과 함께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며 지구가 깨어나는 그 경이로움을 지켜보고 싶다. 마지막 셋째 날. 다시 나는 일찍 일어나 동트는 아침을 지켜보며 이날의 새로운 계시를 체험하고 싶다. 이날 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밤중이 깊어가 나의 마지막 밤이 문을 닫을 때 나는 이 사흘간 보았던 모든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감사할 것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볼 수 있다는 것은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마찬가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 단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감격이고, 경탄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자 평생 걷지 못했던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날 걷지 못했던 사람은 결코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뉴욕에서 왔을 때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댈러스에는 볼 것이 별로 없답니다. 운동도 골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댈러스에 와서 1달이 지났는데 댈러스에는 볼 것도 많고, 운동할 것도 많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성당까지 차로가면 5분이지만 걸어가면 50분이 걸립니다. 매일 성당 갈 때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새벽의 바람과, 오전의 바람 그리고 오후의 바람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대형을 유지하며 날아가는 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모양의 구름, 양 모양의 구름도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로질러가는 뱀도 볼 수 있습니다. 비가 제법 온 날에는 둑 가까이 불어난 불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에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껑충껑충 뛰어가는 토끼도 볼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 숲속을 걸으면 산책 나온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고, 길을 청소하는 차량도 볼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걸으면서 강의를 듣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1달이 조금 넘었는데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댈러스는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제게 보여 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함께 할 공동체가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물리적인 시간)은 어쩌면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의미의 시간)은 언제나 감격과 감탄의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서는 사제관에서 성당 가는 길이 곧 엠마오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은 말 그대로 충격, 경악, 감탄,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시작 되었을 지라도 곧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박해와 고문과 죽음을 계속 이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어어 올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박해와 고문을 받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당하게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피와 땀이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2000년이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라뿌니라고 소리쳤던 마리아와 같은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긴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빵을 나누었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진한 감격과 감탄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헬렌켈러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방긋 웃는 아의 모습에서도,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의 땀방울에서도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리들 또한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성가 461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을 이 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 마저 하시며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뜻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복음: 루카 24,13-35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엠마오 소풍 길에 만난 형형색색의 꽃들, 어찌 그리 눈부시고 화사하던지요.

나이 탓인지,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것들을 보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끔찍하게 먹어버린 제 나이를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꽃 길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길고 혹독한 겨울을 잘 견뎌낸 우리에게 또 다시 찬란한 눈요기를 선물로 주시는구나.

이런 저런 매일의 고통을 잘 이겨낸 우리에게 위로의 선물로 화사한 봄날을 보너스로 주시는구나.

 

엠마오 길에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꽤 긴 여정을 그분과 함께 걸었지만,

시종일관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야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이 기쁨으로, 슬픔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초라하고 누추한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뵌 제자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존재 방식은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입니다.

엠마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끄러운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 저 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 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 오신다신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고 절망하고 슬픔에 빠져,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루카 24,17) 

“무슨 일이냐?”

(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는 말한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콜로 3,1-3)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계 안에 매달리는 대신 그 너머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2.부활 팔일 축제내 화요일                                                         사도2,36-41 요한20,11-18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과 회개의 여정”

                                                             -만남, 회개, 치유-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 위에 있나니,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제 살리려 하심이네.”(시편33,18-19)

 

일어나 방문을 여니 편지함에 빈봉투가 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봉헌예물을 뺀 다양한 빈봉투들에는 피정을 마치고 떠난 분들의 다양한 내용의 소원들이

제 각각의 필체로 가득 씌어져 있었습니다.

흡사 루카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 봉투가 연상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성금이 담겼던 다양하면서도 초라한 빈봉투들 역시 빛나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눈만 열리면 세상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할 때 주님을 만나고 참나를 발견합니다.

사랑의 열정이 회개에로 이끌고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회개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전적인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회개는 함께 갑니다. 

 

살아 있을 때 사랑이요 기도요 회개이지 죽으면 사랑도 기도도 회개도 끝입니다.

“사랑하라, 기도하라, 회개하라”고 우리 삶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도 기도하기도 회개하기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며 원망하며 불평하며 싸우며 살기에는

너무 허망하고 억울합니다.

 

참된 겸손도 지혜도 사랑도 회개의 열매입니다.

오늘 다산 옛 어른이 말씀도 저에게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제 식구는 챙기지 못하면서 밖에서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먼저 살림을 마련한 다음 시(詩)와 예(禮)를 배워 가슴에 쌓으라.”

“늘 가난하면서 인의(仁義)를 말하기 좋아한다면 그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참으로 회개한 지혜로운 이들은 아주 현실적이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땅의 현실에 지극히 충실합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깨우침이 되는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란

말마디도 회개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이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땅깊이 뿌리내릴수록 하늘 높이 가지들 뻗는 살아있는 나무들 이치와 똑같습니다.

일어나자 마자 열어본 다음 카톡 메시지도 회개의 표징입니다.

 

“신부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신부님의 건강과 행복은 우리들의 행복입니다.”

 

이런 사랑의 메시지가 회개를 촉발합니다.

정말 변할 것은 누구도 아닌 나부터요, 끊임없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끊임없이 내적변화의 회개를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읽은 영어 말마디도 문득 생각이 납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도 그 정도다)

 

내가 먼저 변할 때, 이웃도 세상도 환경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부단히 주님을 닮아 변하고 새로워질 때 주변도 세상도 점점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도 평생 회개의 여정을 통해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회개를 통해 이뤄집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회개가 주제입니다.

슬픔중에도 샘솟는 사랑의 열정으로 주님을 찾아나선 마리아 막달레나, 아직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주님과의 만남의 과정은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빈무덤 안에서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가 이뤄집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곧 이어지는 부활하신 주님과 마리아의 대화입니다.

주님을 앞에 보면서도 주님을 모릅니다.

회개로 눈이 밝아져야 보이는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똑같은 주님이지만 눈이 열려야 보이는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주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정원지기로 착각한 듯 하지만 마리아의 말이 맞습니다.

정원이 상징하는바 에덴동산이고 바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돌보는 정원지기는

부활하신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파스카의 예수님은 정원지기이자 생명나무도 됩니다.

내 삶의 자리, 새로워진 에덴동산에서 만나야할 정원지기이자 생명나무가 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생명나무의 열매인 성체를 모시는 미사시간입니다. 

 

회개의 은총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 이뤄지는 마리아의 전격적 회개입니다.

주님이 마리아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부르니,

“스승님!”이란 뜻이다.’

 

이때 마리아의 감격은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 외치던 장면과

흡사합니다. 착한목자 주님의 부르심에 돌아서서 즉각적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돌아서서”란 말마디가 상징하는바 파스카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새롭게 살아나니 이제 옛 마리아가 아닙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주님과 유일무이한 관계에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남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칭하시니 이제 우리들에게 파스카의 예수님은 스승이자 형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와 더불어 예수 형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애(友愛)의 여정,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교의(doctrine)’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experience)’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회개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는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어제에 이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계속됩니다.

회개와 주님과의 만남으로 완전히 새로 난 베드로는 옛 베드로가 아닙니다.

열화와 같은 설교로 회개하는 모습들이 흡사 산불처럼 번져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날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다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니다...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회개를, 우리의 세례를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평생성사인 성체성사의 은총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회개의 여정, 주님과 만남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


4월3일(수)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크로노스의 시간(물리적인 시간)은 어쩌면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의미의 시간)은 언제나 감격과 감탄의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에서는 사제관에서 성당 가는 길이 곧 엠마오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방긋 웃는 아의 모습에서도,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의 땀방울에서도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우리들 또한 감격과 감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성가 461 엠마우스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주님을 이 집에 모셔 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 마저 하시며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밤바람 차갑고 문풍지 떠나 주님의 음성이 호롱불 되고 주님의 손길은 따뜻하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조재형 신부)

 

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존재 방식은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입니다.

엠마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끄러운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 저 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 오신다신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양승국 신부)

 

3.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는 말한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

(콜로 3,1-3)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종교적 진술은 일차적으로 정보(information)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을 위한 것임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계 안에 매달리는 대신 그 너머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교의(doctrine)’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experience)’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회개의 여정중에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는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회개의 여정, 주님과 만남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아멘.(이수철 신부)

 

4월3일(수) <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466(96)일 기도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루카 24,16)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3일(수)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