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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6일 토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6일 토요일[(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05(104),43 참조
주님이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믿는 이들이 불어나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 백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세례성사로 새로 난 저희가 불사불멸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4,13-21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13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최고 의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한 다음,
저희끼리 의논하며 16 말하였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명백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진 터이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17 그러니 이 일이 더 이상 백성 가운데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만 합시다.”
18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19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20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 주었다.
그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8(117),1과 14-15ㄱㄴ.16-18.19-21(◎ 21ㄱㄷ 참조)
◎ 주님, 제게 응답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의인들의 천막에서 울려 퍼지는 기쁨과 구원의 환호 소리.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
○ 정의의 문을 열어라. 그리로 들어가 나는 주님을 찬송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문, 의인들이 들어가리라. 당신이 제게 응답하시고,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

부속가

<자유로이 할 수 있다.>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복음 환호송

시편 118(117),24
◎ 알렐루야.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9-15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파스카 신비로 저희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감사하며 드리는 이 제사가
저희에게 영원한 기쁨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갈라 3,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너희는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파견

<부제 또는 사제가 백성을 향하여 말한다.>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진설명: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인내(忍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忍)은 심장을 칼로 도려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심장을 칼로 도려낼 정도이니 그 아픔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耐)는 수염을 하나씩 뽑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수염을 하나씩 뽑아내니 그 수치스러움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 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조롱과 채찍질을 받았습니다. 가시관을 썼고, 창에 찔리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은 달리는 중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통증을 참아내는 것은 완주 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인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통증일 뿐입니다.

 

아이는 주사를 무서워합니다. 그 통증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주사의 통증을 알지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야 더 큰 통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통증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관우는 독화살을 맞은 팔의 독을 치료할 때 통증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워낙 체력도 강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여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통증과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고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통증과 고통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고뇌는 사회와 역사를 위한 선택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지고 가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는 사제 ‘인사적체’가 심각했습니다. 저의 선배 사제들은 보좌신부 4년 하면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보좌신부 8년을 하고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8년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듯이, 직책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보좌신부로 20년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교구는 ‘협력사제’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본당사목을 한 다음에는 특수사목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사적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교구에서 이런 제도를 보완하기 이전에 몇몇 선배 사제들은 기꺼이 자리를 내어 놓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본당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을 만나서 본당신부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보좌신부님들이 본당신부가 될 수 있도록 저 나름대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기꺼이 받아 주셨고,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있고,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선택한 것이기에 기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에게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뇌에 찬 결단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행전 4,13-21

마르코 16,9-15

 

사도들은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내 안에 현존하신다는 강렬한 의식 속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다섯번째 책으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상과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한 역사서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어떻게 만방에 전파되고 지속되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이자 제3복음서의 저자인 루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에 대한 루카복음사가의 기록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행전 4장 13절)

 

제가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면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예수님의 애제자였던 요한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기록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정식 율법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혜롭고 총명했다.

특히 전문직 어부로서 갈릴래아 호수 전체를 꿰뚫고 있었으며, 고기잡이에 관해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복음사가는 그 어떤 가감도 없이 솔직하게 두 사람의 출신배경을 소개합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지혜와 경륜이 충만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당대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언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진솔하고 강력했으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난다긴다 하는 율법학자들도 사도들의 논리정연하고 탁월한 가르침 앞에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의를 하거나 듣다보면 즉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잘 준비되고 진지하게 숙고된 강의인지, 아니며 그저 현란한 말재간과 품위가 떨어지는 천박한 유머로 포장된

영양가가 조금도 없는 강의인지.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우선 힘이 있었습니다. 솔직하면서도 담대했습니다.

애써 포장하거나 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적대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위축되거나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권력가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외쳤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도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한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내 안에 현존하고,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강렬한 현존 의식 속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적대자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전처럼 뒤로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변화의 배경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리잡고 계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제 안에 굳건히 모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먼저 찾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

저 역시 강건해지고, 지혜로 충만해지며,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 118,24)

그렇습니다. 

오늘 이날은 제가 만든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건네주신 날입니다.

 

인간에게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요,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항)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제1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하고,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가라는 파견이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파견입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이요,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렇다면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5.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사도4,1-12 요한21,1-14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 계시다!(Christ is Alive!)”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118,24)

 

금주 부활 팔일 축제중 날마다 부르는 복음 환호송이 마음을 파스카의 참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부활 대축일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사는 우리 믿는 이들이요 날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부를

시편 복음 환호송입니다.

 

어제 읽은 일화를 나눕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살다 간 수도자 사로포의 세라피노 성인에 관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고를 털어놓으려고 그를 수도원으로 찾아오면 그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거리까지

그들을 마중나오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합니다.

 

“기뻐하고 기뻐하여라. 그리스도께서 되 살아나셨다!”

 

성인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마디가 얼마나 힘있었는지 그 말소리만 들어도 괴로움이 마음에서 싹 사라지고

희망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금주 부활 팔일 축제내 복음 선포전 함께 부르는 부속가도 참 흥겹습니다.

 

어제 부속가 후반부가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내 희망 그리스도 살아 계시니

 그 제자들 앞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리라.

 그리스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이 여기소서.”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서 언제나 함께 살게 된 내 희망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희망도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선택해 살 때 천국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믿음도 사랑도 살아납니다.

희망에서 기다림과 인내도 있고,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샘솟는 기쁨의 샘이 바로 희망이신 주님입니다.

그러니 희망보다 더 좋은 명약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을 상징하는 어둔 밤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일곱 제자들의 상황을 반영하는 수제자 베드로와

동료들과의 대화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고기 잡으로 가네.”

“우리도 함께 가겠소.”

 

참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상징들로 가득한 참 아름다운 살아 있는 그림같은 장면입니다.

때는 밤이었고,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마음은 참 춥고 삭막하고

밤처럼 어둠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저절로 입에서는 다음 시편 127장 고백이 흘러 나왔을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제자들은 위 시편과 더불어,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ㄷ) 말씀도 연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배경에는 다음 묘사에서 보다시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물끄러미 제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셨습니다.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동녘하늘!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또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절망은 없습니다.

절망의 그 현장 우리 뒷 편에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태양처럼 서 계신,

마침내 절망의 어둔 현장에 희망의 빛처럼 개입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보다 우리 내면의 사정을 잘 아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제자들은 그물을 던졌고,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텅빈 허무는 텅빈 충만의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광석화, 그 순간 주님께서 사랑하신 애제자가 주님을 즉각 알아보며 고백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사랑할 때 보이고 압니다.

사랑의 영안이 활짝 열린 애제자의 고백에 베드로의 반응 역시 수제자답습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 듭니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주님의 출현에 놀란 베드로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의 모습이 흡사 활동가와 관상가의 조화로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익명의 애제자가 상징하는바 교회공동체내의 숨겨진, 교회의 심장같은 사랑의 관상가들입니다.

교회 공동체내에서 참 좋은 조화와 보완관계를 이루는 수제자 베드로 같은 사랑의 활동가들과

애제자와 같은 사랑의 관상가들입니다.

 

주님과 깊은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의 숨겨진 보물, 애제자 관상가들이 있어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사랑의 관상가, 애제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교회 공동체 곳곳에 숨겨진 이런 보물같은 주님의 애제자같은 분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주님은 모두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고,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같은 현실은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 안에 머물 때 견고한 일치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밤의 허무의 어둠은 사라지고 희망과 기쁨,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이 펼쳐집니다.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바뀝니다.

저절로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흡사 아침 미사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 말씀처럼 들립니다.

바로 이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선교열정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명설교가 된 베드로는 옛 베드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열화와 같은 베드로의 설교가 이를 입증합니다.

수제자 베드로의 감동적인 설교 일부를 그대로 나눕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사용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선교 그물은 얼마나 크고 넓은지요!

복음의 그물과는 비교할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나 감동적인 베드로의 설교인지요!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날마다 축제의 삶입니다.

오늘 4월5일과 내일 6일은 총선 사전투표날이고, 4월10일은 총선 투표날입니다.

나라의 명운이 달린 선거입니다.

 

나라가 일제 압제에서 해방된지 79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중인 나라의 독립운동이요,

참으로 역사의식, 민족의식, 공동체 의식, 시대정신과 좋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나라와 국민을

참으로 사랑하는 당과 사람들을 잘 분별하여 대표를 뽑아야 할 것입니다.

 

정당이나 사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살아온대로 삽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말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당이요 사람들이었는지 잘 살펴보고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집짓은 이들이 내버린 돌같은 예수님을, 우리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답게 주님 주시는 분별의 지혜 은총으로 투표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세육창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 만세!

 부활하신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모두 만세!” 아멘.


4월6일(토)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시고, 내 안에 현존하고,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강렬한 현존 의식 속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적대자들의 협박과 위협에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전처럼 뒤로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변화의 배경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리잡고 계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제 안에 굳건히 모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먼저 찾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

저 역시 강건해지고, 지혜로 충만해지며,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부활하신 주님은 집짓은 이들이 내버린 돌같은 예수님을, 우리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답게 주님 주시는 분별의 지혜 은총으로 투표를 잘하시기 바랍니다.(이수철 신부)

 

4월6일(토) <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469(99)일 기도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6일(토) 20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