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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7일 주일[(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7일 주일[(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큰 자비를 기리는 날로 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았음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1베드 2,2 참조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여라. 너희는 그 젖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또는>
4에즈 2,36-37
너희는 영광과 기쁨을 누려라. 하늘 나라로 너희를 부르신 하느님께 감사드려라.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영원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해마다 파스카 축제로 저희 믿음을 불타오르게 하시니
더욱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물로 깨끗해지고 성령으로 새로 난 이들이
성자의 피로 얻은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한마음 한뜻>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4,32-35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8(117),2-4.16-18.22-24(◎ 1)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또는
◎ 알렐루야.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제2독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5,1-6
사랑하는 여러분,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20,29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알렐루야.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주님의 자비에 감사하고 이를 본받아 실천하며, 인류 구원의 복음을 용감히 전하게 하소서.

2. 우리나라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의 주님, 선거를 앞둔 이 나라를 굽어살피시어, 공정하고 깨끗한 선거를 치르게 하시고, 뽑힌 이에게는 정의와 지혜를 심어 주시어,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일하게 하소서.

3. 여성들의 존엄과 소명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온유하신 주님, 모든 문화 안에서 여성을 보살펴 주시어, 여성의 존엄과 가치가 인정받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을 없애게 하시며, 여성의 소명을 일깨워 주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굽어보시어, 모든 이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세상을 돌보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과 세례로 새로 난 자녀들)이 바치는 제사를 받으시어
주님의 이름을 믿고 세례로 새로 난 저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20,27 참조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초대 교회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이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큰 능력을 드러내며 큰 은총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고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이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하여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2 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파블로 네루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은 모호하지만 명확하다. 자연은 덧없지만 풍성하다. 우주는 무한하지만 무관심하다.” 인생에서 명확한 것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태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터널과 같습니다. 암흑과 같은 터널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생의 서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은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겁의 시간 속에 자연은 이렇게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속에 개념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이 무한한 우주를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게 되고,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우주를 있게 한 절대자를 떠올립니다. 신앙인은 그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이외에 우주라는 커다란 화폭 위에 별들을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재물을 많이 가져도, 명예를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분노와 원망입니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을,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은 부모를 잘못만나서, 이웃을 잘못 만나서, 시기를 잘못 만나서라고 생각하면 평화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셋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를 지고 갈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롭지 못한 이런 조건들을 다 극복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고 걱정하지 마라, 지금 목마르고 굶주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2주일: 나해

복음: 요한 20,19-31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오랜만에 손맛도 보고 꽃구경도 할 겸 남도 쪽으로 공동체 엠마오 소풍을 갔습니다.

뭐가 그렇게 먼지? 몇 시간을 달려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여기저기 나들이를 다녔지만, 봄비에, 황사에 제대로 된 꽃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닌가 보다 하는 마음에 꽃구경을 포기하고 그럴싸한 포인트를 찾아 낚싯대를 드리웠습니다.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으니, 수온도 괜찮고, 물때도 좋아, 폭풍 입질을 기대했습니다.

 

결과는? 꽝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쉼 없이 자리를 옮겨 다녔지만,

그 어떤 생명체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박사일 간의 고된 여정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딱 도착했더니,

목련꽃이며 수선화며, 산수유며,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해서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에 혹시나 해서 자주 가는 집 근처 단골 포인트로 밤낚시를 갔었는데, 결과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간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폭풍 입질이 계속되었습니다.

후두둑 하는 입질과 함께 선상 낚시급 우럭들이 올라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엠마오 소풍 절대 멀리 가지 않겠다.

우리 집이 천국이고, 우리 집에 포인트고, 우리 집이 꽃길인데, 가기는 어딜 간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공동체가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부활 예수님을 만나뵙기 위해 멀리 엠마오 소풍을 갔었지만,

제대도 된 꽃구경도, 제대로 된 손맛도 못보고, 제대로 주님도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가 갈구하던 주님은 바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마을 안에 계셨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에 존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번 주말도 많은 피정객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한팀이 나가고 나니, 바로 또 한팀이 들어왔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바빴습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침실 셋팅하고, 회떠오고, 치킨 사오고, 강의하고, 불지피고...정신없이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부활 예수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신 형제 자매들 안에 떡하니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자비주일>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줍니다.

곧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라고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하는 일, 곧 ‘자비를 베푸는 일’이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탈출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주며, 짊어져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고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주고 걸머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6.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4,13-21 마르16,9-15

 

                                                       무지(無知)에 대한 답(答)은

                                          “진리(眞理)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이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주님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진리이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뿐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주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말씀은 거의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과 그 변화를 보여줍니다.

사실 성서는 거의가 주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대로 만남, 회개, 자비, 지혜, 겸손, 용기로 이어지는 인간 현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닥치는 대로 벌면 닥치는 대로 쓴다. 사람답게 쓰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벌어야 한다.”-다산

‘사람답게’는 막연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하면 분명해집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가? 치욕을 참고, 목숨을 걸고, 친구를 버리고, 의로움을 버리라.”-순자

부자가 되려는 마음은 무지의 절정입니다.

 

어제 수도형제와의 대화중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착함과 약함의 차이를 새삼 깨닫습니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형제에 대한 수도형제의 진단입니다. 

 

“착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정신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력이 강한 이들을 멘탈 갑이라고 말합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그분은 매우 섬세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약하지 않았고, 강했습니다.

그분은 겸손했고 누구에게 부담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참 고귀한 인품의 두 어른 교황님들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마지막 만남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베네딕도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분의 의식은 여전히 또렸했으나 말씀하실 수는 없었다.

그분은 나를 바라보고 내 손을 꼭 쥐었고 내 말하는 것을 이해하였으나 한마디도 분명히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보면서 그분과 함께 잠시 머물렀다.

나는 그분의 맑은 눈을 기억한다.

나는 그분께 애정 가득한 몇마디 말씀을 드리고 강복을 드렸고, 서로는 말없는 중에 작별인사(goodbye)를 했다.”

 

이어지는 회고담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현인(賢人)”인 교황들입니다.

 

“교황들 사이에는 일관성(continuity)이 있다.

각 계승자인 교황은 언제나 일관성으로 특징지어 진다. 일관성중에 각자 고유의 은사가 빛을 발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일관성이 있고, 파탄(rupture)은 없다...몇몇 추기경들이 베네딕도 교황에게 가서

내가 이단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모두를 경청했고 위엄을 지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단이 아니다.’ 그분은 이렇게 나를 방어해 주었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방어해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전임 교황을 회고하는지요!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위대한 인품과 우정의 교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던 분들의 고백을 듣고 불신했던 무지한 제자들의 반응과 더불어

주님의 꾸중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불신과 완고한 마음’ 이것이 주님을 만나기 전 무지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회개와 더불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음이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사명의 부여가 이를 입증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는 이들의 최우선의 책무가 복음 선포입니다.

안으로는 친교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가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정직과 용기의 제자요 사도가 됨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유언대로 선교사로서 맹활약이 시작된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의 특징은 담대한 용기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유롭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다음 묘사가 참 좋은 증거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사도들의 담대한 용기는 다음 고백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 자유로워지고 담대해진 사도들입니다.

박해자들에 대한 순교자 영국의 토마스 모어(1478-1535)의 감동적인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는 “왕의 좋은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선입니다.”(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왕의 종’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우선이라는 고백이요,

담담히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가톡릭 교회는 2000여년 동안 훌륭한 역사와 전통을 면면히 계승해온 위대한 종교입니다.

우리 교회는 완전히 문맹의 사람들은 물론 고도의 지성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는 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고도의 관상과 신비주의와 성성(聖性)은 모두에게 주어진 동등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과 사랑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 자비와 지혜,

담대한 용기의 사람으로 변모되니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5,3). 아멘.


4월7일(일) <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 더ㅣ새김 구절

 

1.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행복과 평화는 비슷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평화로울 수 있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신 말씀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3.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몇몇 추기경들이 베네딕도 교황에게 가서

내가 이단이라고 말했다.

그분은 모두를 경청했고 위엄을 지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단이 아니다.’ 그분은 이렇게 나를 방어해 주었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방어해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전임 교황을 회고하는지요!

 

박해자들에 대한 순교자 영국의 토마스 모어(1478-1535)의 감동적인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는 “왕의 좋은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선입니다.”(The King’s good servant, but God’s first),

‘왕의 종’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이 우선이라는 고백이요,

담담히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5,3). 아멘.(이수철 신부)

 

4월7일(일) <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 470(100)일 기도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요한 20,27)

 

주님!

제 손을 펴게 하소서!

꼭 쥐고 있는 아집과 의혹을 내려놓게 하소서.

힘을 내려놓고 무능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손을 펴고 못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사랑에 못 박히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7일(일) 5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