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18일 목요일[(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18일 목요일[(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탈출 15,1-2 참조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하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부활 시기에
저희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더 깊이 깨달았으니
온갖 오류에서 벗어나 진리의 말씀을 더욱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8,26-40
그 무렵 26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길이다.”
27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29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30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물었다.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35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36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37)·38 그러고 나서 수레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40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6(65),8-9.16-17.20(◎ 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찬양 노래 울려 퍼지게 하여라. 그분이 우리 영혼에 생명을 주시고, 우리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셨네. ◎
○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입으로 그분께 부르짖었으나, 내 혀 밑에는 찬미 노래 있었네. ◎
○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셨으니,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 환호송

요한 6,51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2코린 5,15 참조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네. 살아 있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아침 산책길에 신기한 현상을 봤습니다. 둥근 보름달이 서쪽 하늘에 환하게 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쪽 하늘에 여명이 생기면서 점차 밝아졌습니다.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이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마침내 태양이 붉게 떠오르자, 서쪽 하늘에 있던 둥근 달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자연현상이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그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6 24일입니다. 이는 절기상 하지입니다. 하지까지는 낮이 길어지지만, 하지가 지나면 낮은 점차 짧아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12 25일입니다. 절기상 동지입니다. 동지까지는 낮이 짧아지지만, 동지가 지나면서 낮은 점차 길어집니다. 둥근 달이 태양이 떠오르자, 자리를 양보했던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오시자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셨다고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달과 태양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태양이 주는 강렬한 힘도 좋지만, 달빛이 주는 은은한 감성도 좋습니다.

 

한국에서 천만 명이 넘게 보았다는 파묘(破墓)’를 댈러스에서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월광에 물드는 신화가 생각났습니다. 어릴 때,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무당집 아들이 친구였습니다. 친구 집에 가면 굿을 하는 것을 보았고, 먹을 것도 많았습니다. 벌써 50년이 넘은 기억입니다. 친구 집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여름에도 시원한 물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예전에는 동네에 무당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풀이하였습니다. 길과 복은 청하고, 흉 화는 멀리하도록 굿판을 벌였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유교가 채워주지 못했던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내는 굿판이었습니다. 태양과 달, 바위와 나무, 곰과 호랑이, 혼과 영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던 월광에 물들던 신화였습니다. 영화 파묘는 무당과 지관이 함께 어우러져 신명 나는 굿판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그 서사에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있고,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의 사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옹골찬 연기가 있습니다. 디지털과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태양에 바래진 역사와 월광에 물든 신화가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결국 남는 게 없습니다. 양파는 껍질을 벗기는 것보다 요리해서 음식의 재료로 쓰는 것입니다. 종교는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시작과 끝을 파악하는 것보다 지치고 힘든 우리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증명하고, 해석할 필요도 있겠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사도와 공동체가 온몸으로 증언하고, 살아냈던 신앙의 신비입니다.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했던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직접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가 직접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만져봐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저는 어머니가 저를 낳은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를 낳으신 어머니를 믿습니다. 어머니의 젓을 먹었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2000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미 햇빛에 바래진 역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교회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모든 걸 버렸던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던 신앙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날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작은 물방울도 시간만 있으면 큰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길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능히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6,44-51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식탁에서 특별한 숫자를 자주 셉니다.

“8,000!”“7,999!” 아직 남아있는 살아갈 날의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적으로 좋은 노력입니다.

남아있는 날수를 헤아리며, 죽음을 묵상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하기에 더욱 충만한 하루를 살고자 하는

짧은 피정입니다.

 

저도 작년 종합건강 검진 후에 기대 수명 몇 살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그래서 헤아려 보니,

남은 날은 이제 겨우 7000일 남짓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뜨뜨미지근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날 하루를 돌아보고 나면 참으로 기가 막힌 날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빈둥빈둥한 날입니다.

이제 남은 날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이걸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보다 더한 하루는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린 날입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좌충우돌 이웃들과 부딪치고, 나나 상대방이나 크게 상처 입은

마이너스의 날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주로 사랑을 만난 날입니다.

크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날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에 몸 바친 날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하루를 살아도 영양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것, 하루를 1년같이,

하루를 영원처럼 산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는 우리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 지상에서의 모든 순례 여정을 내려놓고

드디어 하느님을 뵙는 결정적 순간의 영원한 삶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내 헌신과 내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 우리는 순간적이나마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성체 순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합일하는

너무나 은혜롭고 행복한 순간, 결정적 구원을 미리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머나먼 훗날, 젊음이 지나가고,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인생의 9부 능선을 넘은 후에야

맛보기보다는, 지금부터 맛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원의 성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성체를 모신 우리가

이 지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을 동반자들과 나누며 만끽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중들은 그분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요한 6,4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살아있는 빵'이란 당신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살아있는 활동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당신의 살', 곧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진 살’입니다.

먹혀서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그를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고,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하는 ‘살’입니다.

이는 당신의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를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신비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단지 ‘죽지 않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드높여지고 영광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탄하올 신비인지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인 것입니다.

 

사실 '먹다'(τρωγω, ‘씹다, 씹어서 부수다’)라는 동사는 인간이 음식을 씹을 때 사용하는 동사가 아니라, 초식동물이 풀을 먹을 때 ‘새싹을 입으로 뜯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초식동물이 풀을 씹을 때는 입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의 근육을 연계해 온몸이 함께 움직여 씹듯이, 말씀을 온몸으로 음미하며 먹는 것, 곧 삶으로 ‘실행’하는 것, ‘실행’으로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를르의 체사리우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들끓었듯이 구더기가 들끓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바로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요한 6,51)이라 하셨으니, 동시에 그 살을 먹은 우리 역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 주시오니,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제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17.부활 제3주간 수요일                                                               사도8,1ㄴ-8 요한6,35-40

 

                                                                파스카의 기쁨

                                                    -부활하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주님께 드려라.”(시편66,1-2)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알렐루야 부활시기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온갖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날로 짙어지는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파스카의 기쁨을 상징하는 신록의 아름다움, 신록의 기쁨입니다.

 

요즘 부활시기 전례도 계속되는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입니다.

부활의 기쁨, 찬미의 기쁨이 없으면 도대체 이 광야인생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수 있을런지요!

예수님 부활 사건이 하느님의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선교해야 하는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이 가르침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물이 한 곳에만 모여 있으면 그 물은 썩는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갈 때 물은 생명의 근원이 된다.”-다산

“하늘은 한 사람을 부유케 하여 사람들의 가난을 구제케 하였으나, 세상은 제 부유함에 취해

가난한 사람을 능멸한다. 이런 사람들은 천벌을 받는다,”-채근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장면이 참 역동적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어 복음은 사마리아에 전파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 및 로마로 판도가 바뀌면서 복음의 불길이 퍼져가는 모습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속담이 그대로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박해와 스테파노의 순교상황시 죽음의 분위기는 생명으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반전되는 모습들이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흡사 강풍에 번지는 복음의 불길같습니다.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며 일곱 부제들중 스테파노에 이어

두 번째에 속하는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맹활약을 펼칩니다.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놀라운 기적들의 발생입니다.

정말 신바람 나는 분위기입니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얼마나 역동적 분위기인지요! 그대로 필리포스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이런 기적에 큰 기쁨,

파스카의 기쁨입니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파스카의 봄철에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예전 인용했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들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엊그제 4월15일은 온종일 부드러운 봄비에 촉촉이 젖은 봄의 대지였습니다.

늘 인용해도 기분 좋은 ‘봄비’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4

 

19년전 봄이나 지금의 봄이나 여전히 똑같은 심정입니다.

봄비처럼 메마른 우리를 촉촉이 적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생명, 우리의 희망, 우리의 기쁨, 우리의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은 어제에 이어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그처럼 다음 대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을,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런지요.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험난한 광야 여정중 세상 것들에 중독이 되어 폐인이 되기도 하고

괴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리워, 보고파, 배고파, 목말라, 주님의 생명을, 사랑을, 평화를 찾아 끊임없이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마디인지요!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 먼저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이어 우리를 예수님께 보내셨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보냄 받은 “하느님의 선물”이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어 또 당신께 온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약속을 환기시키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목적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결연한 자세가 확연히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당신께 오는 이들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릴 것이라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구원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다음 베네딕도 규칙 말씀도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런 구원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기 시작한 우리들이요

저절로 나오는 다음 주님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찬미요, 감동과 감격이옵니다.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오늘이옵니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주님을 찬미할 때, 내 입술은 방실방실 

 속량하신 영혼도 너울너울 기쁘리다.”(시편71,8.23). 아멘


4월18일(목)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 되새김 구절

 

1.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작은 물방울도 시간만 있으면 큰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길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능히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조재형 신부)

 

2. 구원의 성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성체를 모신 우리가

이 지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을 동반자들과 나누며 만끽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 주시오니,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제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부활하신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찬미요, 감동과 감격이옵니다.

 날마다 생명의 빵이신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오늘이옵니다.” 

 

“내 입은 님의 찬미로 가득 차 있고

 진종일 당신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주님을 찬미할 때, 내 입술은 방실방실 

 속량하신 영혼도 너울너울 기쁘리다.”(시편71,8.23). 아멘.(이수철 신부)


 

 

4월18일(목)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 481(111)일 기도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 주시오니,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제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18일(목) 4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