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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4월 30일 화요일[(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4월 30일 화요일[(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묵시 19,5; 12,10 참조
낮은 이든 높은 이든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능과 구원이 나타났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저희가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심을
의심 없이 믿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0-11.12-13ㄱㄴ.21(◎ 12 참조)
◎ 주님,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 내 입은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리라. 모든 육신은 그 거룩하신 이름 찬미하리라. 영영 세세에. ◎

복음 환호송

루카 24,46.26 참조
◎ 알렐루야.
○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당신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네.
◎ 알렐루야.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7-31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에게 이토록 큰 기쁨의 원천을 마련해 주셨으니
기쁨에 가득 찬 교회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영원한 즐거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로마 6,8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믿나이다.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파스카 신비로 새롭게 하신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육신의 부활로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앙꼬 없는 찐빵’이란 말이 있습니다. 겨울철에 많이 먹었던 찐빵에는 ‘팥과 야채’가 들어 있습니다. 팥과 야채가 없는 찐빵은 아무래도 맛이 덜할 것입니다. 추석에 먹는 송편에도 송편 안에 ‘밤, 콩, 깨, 팥’과 같은 것을 넣습니다. 송편에 이런 속이 없으면 송편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맛 집이 있지만 현지인들이 찾아가는 맛 집과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도, 현지에 사는 신부님들은 제주도 도민들이 가는 맛 집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에도 매일 바뀌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론’입니다. 강론이 없는 미사는 어쩌면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을 수 있습니다. 

 

사제는 그날 전례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우들에게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시대의 징표를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해 줍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길을 설명해 줍니다. 사제는 울림과 떨림을 줄 수 있는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시대의 징표를 찾고, 교우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강론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속 빈 강정’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무 실속도 없이 겉만 그럴듯한 것을 비유하여 우리는 속빈 강정이라 합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을 보면 속빈 강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대는 강정이란 음식을 보았는가? 쌀가루를 술에 재어 누에만 하게 잘라서 기름에 튀기면 그 모습이 누에고치처럼 된다네. 겉은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속은 텅 비어 있어 먹어도 배를 부르게 하기는 어렵지. 또한 잘 부서져서 입으로 불면 눈처럼 휘날린다네.” 저는 파티마에 5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4번에는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가 멀기도 했고,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고, 바쁘기도 했습니다. 이번 5번째 순례에서는 교우들과 함께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묵주기도를 하였고, 사제와 교우들은 성모상을 모시고 행렬을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묵주기도를 하였지만, 기도를 통해서 느껴지는 감동은 같았습니다. 마치 사도들이 기도하였을 때, 성령의 감도로 각 나라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이해했던 것 같았습니다. 성모상을 따라서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파티마 순례를 가면 묵주기도와 행렬에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해결되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평화도 중요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으며, 따뜻하게 몸을 감싸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으며, 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집이 없어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이루어 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랜 경험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자리가 보장되고, 수고의 열매를 받아먹는 안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채우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또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14,27-31ㄱ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말을 갈아탄 바오로 사도를 향한 유다인들의 증오와 분노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열성 유다교 신자요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감 청년 바오로였기에 유다인들이 느꼈던 상실감과 배신감은

대단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 입장에서 배반자요 매국노인 바오로 사도를 절대로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개종은 수많은 다른 유다인들의 개종으로 이어졌기에, 어떻게서든 신속히 그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향한 극에 달한 유다인들의 반감과 적개심이 오늘 첫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는데,

참으로 끔찍한 광경입니다.

 

“그 무렵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사도행전 14장 19절)

 

몰려온 군중은 스테파노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바오로 사도에게 큼지막한 돌들을 인정사정없이 투척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돌세례에 바오로 사도는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유다인들은 바오로 사도가 죽은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면서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습니다.

다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속시원해 했습니다.

 

다행히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워낙 정신력과 의지가 강한 분이라 치명적인 돌팔매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비틀비틀 겨우 일어선 그는 피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죽었다 되살아난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나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음 선포 여정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 같았으면 우선 응급실로 갔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상처난 부위 치료도 받고, 뇌파 검사도 받고,

진단서도 끊고, 고소장도 접수하고, 충분히 회복될 때 까지 몇달이고 휴양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데르베로, 데르베에서 리스트라로,

리스트라에서 이코니온으로, 이코니온에서 안티오키아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끔찍한 고통과 박해 속에도 바오로 사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했고 의연했습니다.

언제나 제자들을 격려하고 고무(鼓舞)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주님의 복음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겪은 고통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끔찍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신자들에게 소개하곤 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 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코린토 2서 11장 23~27절)

 

그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평화의 두 단어가 있습니다.

 

‘팍스’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의 주도 아래 주변국가들이 수동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로,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 곧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막강한 구력을 바탕으로 팍스 아메리카나 실현을 목표로 국제질서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을 불러오면서 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또 하나는 ‘샬롬’이 있는데,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하는 ‘샬롬’을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219항; 민족들의 발전 179항 재인용)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 혹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로,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4.29.월요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1347-1380) 기념일

                                                                                                                         사도14,5-18 요한14,21-26

                                                               삶의 중심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다-

 

“주님, 저희에게가 아니라, 

 오직 당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옵니다.”(시편115,1)

 

오늘 옛 어른의 가르침이 신선하고 유익하여 우선 소개합니다.

주님 중심의 겸손한 삶일 때 이런 경지일 것입니다.

 

“본질에 가까워진 단순함 속에는 무수한 복잡함이 담겨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모든 과잉을 제거한 것이다.”<다산>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란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다.”<채근담>

 

오늘은 그 유명한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 기념일입니다.

'순수함'을 뜻하는 이탈리아 이름 가타리나 성녀하면 두분이 떠오릅니다.

 

형제들의 축일 때 마다 LA갈비를 선물하는 신림동의 가타리나 자매와, 형제들의 축일때마다

축하 케이크를 선물하는 춘천의 가타리나 교수입니다.

 

두분 다 우리 수사님들이 고맙게 기억하는 참 순수한 사랑의 봉사로 유명한 성녀같은 자매들입니다.

특별히 가타리나 축일을 맞이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성인 축일때 마다 꼭 확인하는 생몰연대입니다.

중세의 신비가 성녀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1347년에 태어나 1380년 선종했으니,

예수님과 똑같은 33년을 사셨으며 저는 성녀보다 배를 훨씬 넘어 살고 있습니다.

 

성녀의 33년 생애, 정말 불꽃같은 참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서사로 가득한 삶이요 스토리와 컨테츠가 참 풍부한 삶이기에 삶의 간단한 요약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후대의 평가를 통해 얼마나 성녀의 삶의 위대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 자녀중 막내딸로 태어난 성녀는 이미 6세때 예수님으로부터 축성을 받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성녀는 도미니코회 제3회 소속으로 세속의 삶의 자리에서 온갖 교회활동에 전념합니다.

선종하기 3년전 1375년  미사를 드리던 중 오상의 은총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네게 지식과 웅변의 은혜를 준다. 여러나라를 다니며 여러 지도자들에게 나의 소망을 전하여라.”

 

성녀는 각나라의 국왕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찾아, 당시 심한 갈등으로 치닫고 있던 서유럽국가들간에 

평화를 도모했으며, 프랑스에 머물던 교황을 로마로 돌아오도록 하였고, 사치와 향락에 떨어진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회개시켜 교회의 쇄신을 이뤄냅니다.

이 무렵 성녀는 예수님과 신비의 결혼식을 했다고 회고하며 예수님 말씀을 소개합니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나만을 찬미하기 위하여 너는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과 욕망을 억제했으므로,

나는 지금 너를 약혼자로 맞이하여 신앙안에서 신부로 삼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신앙의 갑옷을 입고 모든 적과 맞서 이길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이어온 엄격한 금욕생활과 끊임없는 희생 끝에 쇠약해진 성녀는 33세 나이로

“성혈, 성혈, 성혈” 중얼거리다가 선종하며, 성녀의 33년 전 생애는 영적승리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대화>라는 책외에도 400여통의 서한을 남겼습니다.

1461년 교황 비오 2세가 가타리나를 시성하였고, 1939년 교황 비오 12세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이어 1970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성녀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며, 199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치릴로, 성 메토디오, 성 베네딕도,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타,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와 함께

성녀 가타리나를 유럽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교회가 성녀의 업적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성녀가 즐겨 바친 성령께 바친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중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얼마나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새삼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늘 사랑을 새롭게 강화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도 우리 삶의 중심을 새롭게 강화할 것을 촉구합니다.

한결같이 당신을 향한 사랑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참으로 삶의 중심인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분의 계명과 말씀을 항구히 지킬 때

주님은 친히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그리스의 리스트라에서 선교하는,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어 우상숭배의 무지한 리스트라 사람들은 두 사도의 기적을 목격하고 신으로 모시려 합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두 사도의 열화와 같은 설교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그분께서는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확연히 구분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들과 삶의 중심이 없는, 우상숭배의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들로

구분되니 오늘날도 여전히 엄연한 인간현실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강조했다시피,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살아야 참으로 살아있는,

참으로 행복한 삶임을 널리 알리는 것이 복음선포의 핵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들이 이의 빛나는 모범이요 주변에서도 이런 성덕의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해 주면서,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해주십니다. 아멘,


4월30일(화)[ 부활 제5주간 화요일 ] 되새김 구절

 

1.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조재형 신부)

 

2.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코린토 2서 11장 23~27절)

 

그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쁘고 환한 얼굴,

초긍정 낙관주의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가 즐겨 바친 성령께 바친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성령님,

 제 마음에 오시어

 당신의 힘으로 저의 마음을 이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소서.

 어떤 고통도 가벼운 것으로 여길수 있도록

 당신의 지극히 너그러운 사랑으로

 저를 뜨겁게 하소서.

 거룩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저의 하느님이여,

 모든 어려움중에서 저를 도우소서. 

 사랑이신 그리스도님.

 사랑이신 그리스도님,”(이수철 신부)

 

4월30일(화)[ 부활 제5주간 화요일 ] 493(123일 기도)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4월30일(화) 10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