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18일 수요일[(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본기도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가 드리는 이 제사가
모든 이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
<또는>
1코린 10,16 참조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며, 우리가 나누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먹는 것이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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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며칠 전입니다. ‘라디오 스타’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인기가 떨어진 유명 가수와 가수를 도와주는 매니저의 진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래만 잘하는 가수는 늘 사고를 치고, 매니저는 가수의 뒷수습을 합니다. 강원도 영월의 방송국 진행자가 된 가수는 솔직한 입담으로 지역에서 인기를 얻습니다. 전국 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이 승격되었고, 가수에게 새로운 기획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단 매니저 없이 가수만 영입하겠다고 합니다. 매니저는 20년 넘게 동고동락했지만, 가수의 미래를 위해서 말없이 떠납니다. 가수는 기획사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울먹이며 매니저에게 돌아와 달라고 방송합니다. 방송을 듣던 매니저는 다시 가수에게 돌아오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지지만, 추운 겨울에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소나무와 전나무만이 푸르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진정한 사랑은 고난과 역경의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본당에 어린이 합창단이 문을 열었습니다. ‘임마누엘 합창단’이 있었는데 팬데믹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주보에 어린이 합창단 모집 공고를 하였고, 19명이 합창단에 가입했습니다. 19명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저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페인 몬세랏에는 수도원이 있고, 수도원 성당에서 수사님들이 매일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면서 소년 합창단이 성가를 부릅니다. 지난 4월에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때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롭게 문을 연 어린이 합창단은 예전에 사용했던 이름을 다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본당의 날에, 성탄에, 부활에 공연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고운 노래와 깨끗한 마음이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 줄 것입니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별 대부분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의 빛을 받아서 빛난다고 합니다. 태양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별들이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가 빛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매니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합창단의 고운 노래가 본당 공동체를 환하게 비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목숨까지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에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사랑은 비로소 빛을 낸다고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어둠에 빛을 주고, 이런 사랑의 행위가 절망 속에 희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사랑의 행위가 지친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7,31-35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풉시다
다들 고향을 찾아 떠난 여유로운 시간, 근처 방파제로 고도리 낚시를 갔습니다.
시장표 판매용이 아닌 사이즈가 좀 작은 고등어를 고도리라고 하는데, 나름 손맛이 쏠쏠합니다.
만조 전후로 잘 잡히는데, 떼로 왔다 갔다 하다가 쑥 물고 들어가는데, 도착한 시간이 딱 타이밍이라
정신없이 잡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낚시를 왔는데, 전혀 조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낚시꾼들은 다들 열심히 낚아 올리는데, 꽝 치고 있으니,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슬쩍 바라보니 바늘이며, 미끼며 전혀 아닌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질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잠깐 낚시를 멈추었습니다.
찌도 달아주고, 바늘도 바꿔주고, 미끼도 잘게 잘라 끼워주었습니다.
즉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싱싱한 고도리가 번쩍이며 올라오자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드디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아무래도 인간이 지닌 이타적 성향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낯선 이웃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는 그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인간은 자기라는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돈 한 푼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 앞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섭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긴박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 상황에 뛰어듭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깊은 슬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가 하면 이웃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완고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1)
주님의 심장을 할퀴어 터져 나오는듯한 이 탄성에는 안타까움을 너머 비탄과 자조감마저 듭니다.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곧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마치 회개에 대한 요한의 외침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도 춤추지 않는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도 없고 바닥도 없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르게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그 뿌리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완고함’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원인은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는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이미 아픔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거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됩니다.
어쩌면 바로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피눈물을 흘렀을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렸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반겨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 피리에 춤추게 하소서!
세상 죄악의 곡소리에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픈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기쁨을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 32)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17.화요일 한가위 요엘2,22-24,26ㄱㄴㄷ 묵시14,13-16 루카12,15-21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
“찬양, 심판, 지혜”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시편67,1)
지혜로워야 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로 인해, 탐욕에 눈이 멀어 지옥을 자초해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평생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평생 배우고 배워도 여전히 배워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도 지혜를 가르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못 버리는 것은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다산>
날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려가는, 비워가는, 내려 놓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공자는 네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억측을 버렸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을 버렸으며, 고집을 버렸고, 이기심을 버렸다.”<논어>
한마디로 지혜로웠던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웠던 현인 공자입니다.
오늘은 한가위 추석입니다.
오늘은 삶의 여정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10년전에 끝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여정이요 참 많이도 강론에 등장했던 주제입니다.
오늘 주제는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이르기까지 귀가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계속 배워가야 하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늘 강조했던 바가 일생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일년사계 사계절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검이 삶의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날로 “위에로의 여정(an upward journey)”을
살게 합니다.
저로 말하면 오후 5시,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후 3-4시쯤, 가을철에 속하는 인생들 역시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현역으로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인 가을철 답게 부지런히 노력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외적 수확은 어느 정도이고 갈수록 기도생활, 공부생활에 치열한지 묻고 싶습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졸업이 없는 평생 공부요,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영적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 어떻게 하면 보람있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네 측면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입니다.
찬양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저절로 샘솟는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인 가을철에 걸맞는 찬양의 삶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감미로운 세상에 경탄하는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태양의 찬가를 불러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 찬양 감사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맛이 아닌 하느님 맛으로, 진리맛으로 살게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하느님 중심의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요엘서의 말씀, 오늘 세상에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런 하느님을 잊어 자초한 불행입니다.
도대체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는 찬양과 감사, 그리고 참된 겸손의 삶입니다.
둘째, 심판입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여정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끝날 여정에 늘 심판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가 모두인 듯 사는 것입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철, 언젠가는 주님도 우리 인생을 수확해 가실 것입니다.
과연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잘 익어가는 인생들인지요?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이 실감나게 종말 심판 수확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찼습니다.”
그러니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던 이들은 심판의 날은 구원의 날이자 안식의 평화이기에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들려오는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하늘에 쌓았던 보물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선행, 섬김, 자비, 찬양, 감사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상급과 더불어
행복한 천국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지상(地上)에서부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천상(天上)의 삶입니다.
셋째, 지혜입니다.
탐진치(貪瞋癡)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탐욕의 무지가 우리를 눈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해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무욕의 지혜로운 자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삶이 자유로운 삶, 지혜로운 삶입니다.
소유의 쾌락이 아닌 존재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부자가 참 어리석습니다.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무지의 탐욕으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같습니다.
하늘을 향한 창도, 이웃을 향한 창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느 창도 없습니다.
완전히 고립단절된 이런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스스로 자초해 이런 부자같은 지옥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부자였더라면 땅의 곳간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았을 것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찬미하며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자선의 삶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땅의 곳간에 곡식과 재물을 가득 쌓아두고 자족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조롱하는 하느님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하다.”
세상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촉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삶을,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찬양의 삶, 늘 심판을 염두에 둔 삶,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의 삶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곡 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 주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로다.”(시편57,7). 아멘.
2024년 9월 18일 수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쇼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 32)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4. “공자는 네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억측을 버렸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을 버렸으며, 고집을 버렸고, 이기심을 버렸다.”<논어>
한마디로 지혜로웠던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웠던 현인 공자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하다.”
(이수철 신부)
2024년 9월 18일 수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89일차 기도
복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 32)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18일(수) 6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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