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29일 주일[(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새로운 백성인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모든 사람이 저마다 하느님의 선물을 가득히 받게 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업적을 알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입당송
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11,25-29
그 무렵 25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26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당신의 종도 이 가르침 익히리니, 이를 지키면 큰 상급 받으리이다. 저도 모르는 허물 누가 아오리까? 숨겨진 저의 잘못 씻어 주소서. ◎
○ 오만한 자에게서 당신 종을 지켜 주소서. 제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면 제가 흠 없이 살며, 크나큰 죄악에서 깨끗해지리이다. ◎
제2독서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5,1-6
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8-43.45.47-48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저마다 다른 문화 속에서 화합하며 살아가는 교회를 굽어보시어, 각 지역 교회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며 일치를 이루고 다 함께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2. 우리나라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의 주님, 고령 사회로 가고 있는 이 나라를 살펴 주시어, 노인이 외로움과 질병의 고통을 이기고 가족과 이웃의 보살핌으로 위로를 얻게 하소서.
3. 이주민과 난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온유하신 주님,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생겨나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보살펴 주시어, 가는 곳에서 환대를 받으며 정착하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선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에 지혜를 주시어, 하느님 마음에 들며 선하고 완전한 것을 분별하고, 기쁨과 사랑으로 주님을 찬미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이 제사로 저희에게 온갖 복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저는 그 말씀에 희망을 두었나이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
<또는>
1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신비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며 그 수난에 참여하고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지난주에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본당의 날이 잘 끝났습니다.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믿음과 미신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바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기 때문입니다. 이미 포도원이 많이 있음에도 나붓의 하나 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 왕은 하느님께 기름부음 받았던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내가 믿음의 삶을 사는지, 미신의 삶을 사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숙한 신앙과 미성숙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숙한 신앙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길이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서를 읽고, 교리를 잘 아는 지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활동을 많이 한 업적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직자와 수도자처럼 직책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더 좋은 땅을 조카 롯에게 기꺼이 양보한 아브라함,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의 제단에 기꺼이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던 형들을 용서하고, 품어 주었던 요셉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용감하게 왕 앞에 나섰던 에스테르 왕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던 마리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일까요? 하고 싶은 일만 하려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짜증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심에 동생을 죽인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던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유다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안다고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미성숙은 직책으로도, 능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버려야 한다.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발을 버려야 한다.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한 발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버려야 한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한 눈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손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발에 못이 박힌 것은 발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것은 미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성숙한 신앙인이었다면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2. 양승국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일: 나해
복음: 마르 9,38-43.47-48
이주민과 난민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합시다!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그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날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이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도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에 단체로 예멘 난민이 입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 곧 나라가 파탄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다문화 다민족, 다국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적 망신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러운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 ‘이주자’에 대해 언급하시며,
착한 목자로서 당신 자신의 품격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교황님께서는, 부단히 난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떠났던 난민이셨습니다.
난민들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분별없고 무책임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땅과 뿌리, 가족과 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난민들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선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품격있는 교황님의 말씀과 처신에 큰 박수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냅니다.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난민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6주일: 나해
<독점과 독선의 악>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일흔 명의 원로를 뽑아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두 명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한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수가가 모세에게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모세는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민수 11, 29)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듭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운영 방식에 대하여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령주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단체나 조직이 아니며, 그 본질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성령의 주도성’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인 자신이 영을 받은 그룹으로서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지니고 싶어 하지만, 모세는 오히려 온 백성에게 영이 내려지기기를 바랍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물질적 소유적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청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인의 손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자신을 만족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부유한 자들에 대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합니다.
“부자들이여!
...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야고 5,1-2)
오늘 복음은 두 개의 단락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 요한은 제1독서의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르 9, 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요한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제자그룹에 끼어주고 싶지 않는 ‘제자임에 대한 특권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를 따르는 이가 아니라 하여 그를 막는’ 제자들의 옹졸한 마음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 (마르 9,39)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들이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특정 분파나 집단에 국한되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활동이 더욱 확장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 신앙의 지평이 넓고,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의 항의에 대한 모세의 태도에서, 또 복음에서 제자의 옹졸한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여주듯이,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와 협력을 촉진하고, ‘다양성 안에 일치’라는 교회 정신을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를 당신 ‘협력자’로 모으십니다.
곧 교종이나 주교, 성직자나 수도자, 세례 받은 신자들만을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물며 자기 형제들을 막는 일은 더 더욱 안 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뒤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마르 9,42)
결국 오늘 제1독서에서는 권위의 독점에서 오는 갈등을 보여주며, 제2독서에서는 재물의 독점에서 오는 악행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닌 독점과 독선의 태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의 여정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점과 독선의 악을 성령의 힘으로 정화하고 정련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2)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비록 그들이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이제는 제 손과 발이 그들을 가로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며, 그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당신께 꼭 붙들려 매여 있게 하소서!
오늘, 제 몸과 마음을 절단하고 수술하시어, 온 몸이 망가져 사라질지라도 더 귀중한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28.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코헬11,9-12,8 루카9,43ㄴ-45
인생을 즐겨라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여라”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90;1,14)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하면 걷는 자세가 곧아진다.”<다산>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요 새로운 각오입니다.
“행했는데도 얻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원인을 살펴라.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맹자>
자신이 바르면 하느님은 친히 보호자와 방패가 되어 도와 주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추하게 ‘늙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가을 열매들처럼 곱게 ‘익어가는’ 인생이면 좋겠습니다.
바로 지혜가 그렇게 품위있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겸손한 자요, 겸손의 지혜가 아름답게 빛나는 익어가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오늘로서 코헬렛 제1독서는 끝납니다.
오늘 내용 역시 얼마나 풍부하고 좋은 자극이 되는 지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허무주의의 병(病)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허무의 가시가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허무는 바로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기억하라는 신호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하느님뿐입니다. 시종여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같은 하루 꽃같이,
시같은 하루 시같이,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며, 아름다운 선물 인생을 살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보답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아깝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며 단숨에 읽혀 집니다.
코헬렛 성서가 아니곤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교훈을 들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코헬렛이요 이래서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비단 젊은이뿐 아니라 늙은이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깨우침이 되는 코헬렛입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알고 보니 코헬렛은 순수한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젊음의 날은 물론 늙음의 날에도 읽고 배우고 깨달아야할 코헬렛의 지혜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이 닥치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한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늙음이요 죽음입니다.
코헬렛은 참으로 지혜로운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입니다.
결코 꿈속에 사는 낭만주의자가 아닙니다.
젊은이는 물론 늙은이도 배워고 익혀야 할 지혜입니다.
이래야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치매에 걸리지 않고, 가을 단풍처럼, 저녁 노을처럼,
‘곱게’,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레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늙어가면서 심신이 서서히 무너지기 전, 철이 남으로 창조주를 기억함이 유비무환이겠지만,
무너지는 중에도 당황하지 말고 사랑의 생명줄인 창조주 하느님의 끈을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살라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아주 오래전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미리 써보라는 과제에 이 구절을 택한 수도자로 인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허무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나는 코헬렛,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로 살라는 각성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코헬렛 독서에는 없는 마지막 부분 말씀이 코헬렛 현자의 충고 말씀이 참 정답고 고맙습니다.
“내 아들아,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하느님 지혜이신 영원한 최고의 현자,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참 귀한 지혜의 가르침이 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후,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 절정에 있고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어 제정신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할 때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듯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못 알아 들었고,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였지만,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평생화두가 되었을
말마디입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환상일 뿐이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영성이
진짜 영성이자 참지혜이며 우리 삶을 날로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일치와 더불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
이상주의자, 현실주의자로서의 삶이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시편90,17). 아멘.
2024년 9월29일 일요일 [(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되새김 구절
1.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바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일까요? 하고 싶은 일만 하려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짜증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양승국 신부)
3.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령주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단체나 조직이 아니며, 그 본질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합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의 항의에 대한 모세의 태도에서, 또 복음에서 제자의 옹졸한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여주듯이,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와 협력을 촉진하고, ‘다양성 안에 일치’라는 교회 정신을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못 알아 들었고,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였지만,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평생화두가 되었을
말마디입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환상일 뿐이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영성이
진짜 영성이자 참지혜이며 우리 삶을 날로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이수철 신부)
2024년 9월29일 일요일 [(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100일차 기도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29일(일) 11시30분-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4년 10월 1일 화요일[(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4.10.01 |
---|---|
[매묵]2024년 9월 30일 월요일[(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4.09.30 |
[매묵]2024년 9월 28일 토요일[(녹) 연중 제25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2) | 2024.09.28 |
[매묵]2024년 9월 27일 금요일[(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4) | 2024.09.27 |
[매묵]2024년 9월 26일 목요일[(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7) | 2024.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