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9월 30일 월요일[(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본기도
복된 예로니모 사제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들이게 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욥기의 말씀입니다.1,6-22
6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9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11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12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13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14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15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6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7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8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나리의 아드님들과 따님들이 큰아드님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19 그런데 사막 건너편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서리를 치자,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21 말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2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
○ 당신 앞에서 저에게 승소 판결 내리소서. 당신 눈으로 올바름을 보아 주소서. 제 마음 떠보시고 밤중에도 캐 보시며, 저를 달구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 ◎
○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놀라우신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당신 오른쪽으로 피신하는 이들을, 적에게서 구해 주소서.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티모 3,14-17)와 복음(마태 13,47-5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저희가 복된 예로니모를 본받아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구원의 제물을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예로니모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시고 기뻐하오니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9월에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3일에는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가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함께 했습니다. 점수를 계산하는데 약간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순위가 바뀌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드리고, 상패를 전달했습니다. 일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상패를 받은 분들도 이해해 주었고, 기뻐하였습니다. 10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4년 전에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형제요, 어머니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이다.”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22일에는 ‘본당의 날’ 잔치가 있었습니다. 2012년에 본당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었고,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12년 만에 본당의 날 잔치에 함께 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함께 모여 사는 것, 오직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본당의 날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우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9일은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었습니다. 미카엘은 사탄을 물리치는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라파엘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천사입니다. 사탄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아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천사입니다. 저의 축일을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순교자성월인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자 영성의 시작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의 결과” 곧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를 통한 죄의 용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기 이전의 삶에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활은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9,46-50
걱정이나 근심, 유혹이 다가올때면 즉시 성경을!
언젠가 진심으로 성경에 매료되어 목숨 걸고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교구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런저런 성경 공부 과정을 빼놓지 않고 수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2년 과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평생토록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죽기살기로 일하셨으니,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운동도 나가시고, 좀 여유있게 지내시면 좋을텐데, 어찌 그리 성경을 파고드십니까?”
형제님 왈, “그동안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천지를 헤매다녔지만 찾지 못했는데,
성경 안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유혹과 갈등을 떨치는 데는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놀았습니다. 이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도 빠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무너져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며 은둔 수도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세속의 유혹은 수시로 떠올라 예로니모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로니모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유혹은 예로니모를 흔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번역하고 연구하고, 그것이 그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온 종일 성경 번역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 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동안 한사코 미사 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경에 대한 번역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 다시 20여 년간의 세밀한 번역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서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에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진정한 큰 사람'>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 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 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 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 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작은 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29.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민수11,25-29 야고5,1-6 마르9,38-43.45.47-48
바람직한 지도자상
“너그러운, 나누는, 죄에 단호한 지도자”
“주님의 계명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법은 환하시니 눈을 밝혀 주도다.”(시편19,9)
오늘은 참으로 소개할 사항이 많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라 대천사 축일을 못 지냅니다만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미카엘, 미카엘라,
가브리엘, 가브리엘라, 라파엘, 라파엘라 세례명을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전합니다.
저에게도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참 좋은 분들이 떠오릅니다.
오늘 주일 미사때 기도하며 봉헌하려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바람직한 지도자상’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역사상 이런 성인 지도자들을 많이 지녔었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이런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우리 신자들은 주님에 이어 이런 훌륭한 지도자들을 보고 배우니 참 큰 복입니다.
오늘 연중 제26주일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담화문을 통해, “모든 시대에 그러하였듯 우리 시대 이주민, 난민들안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나그네라는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발견할 수 있고,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살아있는 표상을 볼 수 있으며, 이주민과 만남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라 말씀하시며
이들에 대한 환대와 배려를 촉구했습니다.
정순택 대주교 역시, “이주민에 대한 존중과 환대, 그리고 보호는 곧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며,
저출산과 고령화 위기가 예견되는 한국 사회 미래에 이주민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강조했습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마음과 시야를 한없이 멀리, 넓고, 깊게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마티아 주교는 지난 9월23일 1974년 출범하여 숱한 위업을 이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 지도자로서의 시의적절한 축하메시지 일부를 나눕니다.
“앞으로도 하느님의 사제로서 성교회의 복음 정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정진하시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러 계층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매우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인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를 살리는 생태환경 보존을 위해서도
힘을 모아주시기를 빕니다.”
또 한 분 좋은 지도자들 소개합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예레미아스 슈레더(59세) 총재 아빠스가 9.14일,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속의
215명 남자 수도원장들과 대표 수녀들 22명이 모인 가운데 선거에서 베네딕도회 총연합 수석 아빠스로
선출되었습니다.
명실공히 전 세계 2만2천여명의 베네딕도회 회원을 대표하게 되었고, 수도공동체에 보낸 서신도 일부 나눕니다.
“젊은 수도자로서 그동안 저는 우리 삶의 선교적 성격이 우리의 위대한 수도원 전통에
그리스도 중심의 긴박함을 더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것이 저에게 영감과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수백명의 형제, 장상, 비서, 선교총무들, 그리고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소박한 수도자들과 함께
일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의 당선은 여러분께서 저에게 주신 이러한 배경과 경험과 관련이 많습니다.
이제 저는 총연합 전체를 포용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넓혀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도 수차례 방문한바 있는 참으로 탁월한, 공과 사가 분명한 바람직한 교회의 사람이자
전 세계 베네디도회 총연합의 지도자가 된 예레미야스 슈레더 아빠스입니다.
39세쯤 오틸리엔 수도원의 아빠스로 시작하여 20년동안 경륜을 쌓으면서 그 능력이 검증된,
수개 국어와 소통에 능통한 세계적 지도자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은 나이에 관계 없이 이런 훌륭한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리고 순종과 섬김, 겸손과 지혜, 그리고 맡은바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도 이런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보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연중 제26주간 미사중 셋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배웁니다.
바로 제1독서 민수기의 모세를 통해,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참으로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배웁니다.
모두의 공통점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비롭고 너그러운 지도자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서로 닮았습니다.
두분 다 참으로 넉넉하고 너그러운 분들로 마음 넓기가 하늘같고 바다같습니다.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영이 내려 예언하는 엘닷과 메닷을 말려야 한다는
간청에 모세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편협함을 부끄러워하며 너그러운 모세로부터 크게 보고 배우며,
모세의 후계자로서 지도자 수업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똑같은 역할을 복음의 요한이 그렇게 합니다.
같은 일행이 아닌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하자 이를 막아보려 했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요한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모세를 닮았습니다.
“막지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든 공동선에 기여한다면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닮은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그런 이를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며, 환대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덧셈 관계의, 상생(win-win)의 달인이자 대가인 지도자 예수님이자 모세입니다.
이것 저것 부족한 것, 단점만 생각하는 부정적 뺄셈의 지도자라면 살아 남을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둘째, 나누고 섬기고 배려하는 지도자입니다.
부자들을 질책하는 야고보 사도는 구약의 정의와 사랑의 예언자들을 닮았습니다.
재물에 노예되어 인간 품위를 상실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바로 나눔과 섬김, 배려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부자들이여!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그대들은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이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삶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하고 있는, 탐욕의 무지에 눈이 먼, 탐욕에 중독된
참 어리석은 부자들입니다.
셋째, 죄에는 단호한 지도자입니다.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예수님이지만 죄에는 단호합니다.
평범한 신자들에게 죄의 유혹과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온 산을 불태우듯 죄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죄에 중독되어 죄인줄 모르고 사는 대로 생각하며 돌아올줄 모른다면 돌아올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하시는 말씀이 충격적이니 그렇게 죄의 해악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대로라면 천국은 불구자들 뿐이겠습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깊이 깨달아 단호히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라는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젊고 힘있을 때 죄이지, 늙고 힘없고 병들었을 때는 결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니
상처가 오래 가고 치유에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입니다.
약까지 먹으면서 은총으로 사는 처지에 죄를 짓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좋은 지도자뿐 아니라 참으로 참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은 품위의 사람, 향기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을인생에 접어든 분들은 가을의 품위와 초연함으로 살 일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믿는 이들에게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입니다.
공부주의 공부가 사람되는 공부, 성인되는 공부, 군자되는 공부입니다.
“군자가 정성을 보존해 생각하고 삼간다면 평안해져서 온몸이 마음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다산>
그러니 지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은 너그러운 삶, 나누는 삶, 죄에 단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면서 죄의 방패역할을 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요한17,17). 아멘.
9/30(월)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조재형 신부)
2.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영이 내려 예언하는 엘닷과 메닷을 말려야 한다는
간청에 모세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편협함을 부끄러워하며 너그러운 모세로부터 크게 보고 배우며,
모세의 후계자로서 지도자 수업에 충실했을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9/30(월)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101차 기도
복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30일(월) 17시5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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