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0월 1일 화요일[(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발표된 병상 저서들은 세계 곳곳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께서 그를 시성하시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셨으며, 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셨다.
입당송
주님은 그를 감싸 안아 돌보아 주시고,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네.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들어 올려 죽지 위에 얹어 나르듯,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셨네.
본기도
저희가 복된 데레사의 길을 충실히 따라
그의 전구로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뵈옵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욥기의 말씀입니다.3,1-3.11-17.20-23
1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2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3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에도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외치나이다.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
○ 제 영혼은 불행으로 가득 차고, 제 목숨은 저승에 다다랐나이다. 저는 구렁으로 떨어지는 사람처럼 여겨지고, 기운이 다한 사람처럼 되었나이다. ◎
○ 저는 죽은 이들 가운데 버려졌나이다. 마치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 같사옵니다. 당신이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니, 당신 손길에서 멀어진 저들처럼 되었나이다. ◎
○ 당신이 저를 깊은 구렁 속에, 어둡고 깊숙한 곳에 처넣으셨나이다. 당신의 분노가 저를 짓누르고, 당신의 성난 파도가 저를 덮치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66,10-14ㄷ)와 복음(마태 18,1-5)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복된 데레사를 기리는 저희가 놀라우신 주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앞에 엎드려 청하오니
그의 공로를 기꺼워하셨듯이
저희가 바치는 제사도 기쁘게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데레사가 주님께 바친 그 사랑이 저희 안에서도 타오르게 하시어
저희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엎친 데 덮친다.’라고도 합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캐롤턴 반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날 복음 나누기는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온지 1년 된 자매님이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낯선 곳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힘들어 했습니다.” 한국에 어머니가 있는 자매님도 ‘열려라’를 묵상하면서 아픈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어머니에게 ‘열려라’라고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니, 다른 분들도 눈물 흘렸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복음 나누기’를 배웠습니다. 교구 사목국에 있으면서 구역장, 반장들에게 복음 나누기를 알려드렸습니다. 그 복음 나누기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복음 나누기의 영성은 말씀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날 주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복음 나누기를 통해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도 ‘에파타’를 묵상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복음서는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람어를 그대로 기록한 곳이 있습니다. ‘에파타, 탈리타꿈,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입니다. 성서의 저자는 이 말씀들이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에파타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탈리타꿈은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저는 닫힌 마음이 열리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려있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어집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닫혀있으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으로 닫혀있는 정치인들의 마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열려 있으면 좋겠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두려움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에도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외치나이다.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9,51-56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칩시다!
한류 열풍의 기세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지속적으로 끌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K-드라마나 영화, 가요인데,
그저 흥행만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풀라는 의미인지, 여차하면 주먹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니,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인격자인 인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이기에,
내면 깊숙한 곳에 강한 공격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천하 밉상인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요한 9,54)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더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고자 하시기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갈릴래야에서의 활동이 배척을 받았듯이, ‘예루살렘 상경기’도 배척받음으로 시작되며, 결국 예루살렘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30.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347-420) 기념일 욥1,6-22 루카9,46-50
사랑의 찬미
“경천애인(敬天愛人)”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 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교황님의 제46차 해외 사목 방문중 루벵 학생들에게 한 감동적인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추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공부는 권력의 도구가,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나가라. 이념들의 이분법에 들어가지 마라.”
엊그제 수도원 ‘자캐오의 집’, 피정집에서 단체 피정지도중 제의방에서 불암산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나온 고백에 행복했습니다.
흡사 주님 앞에 서있는 듯 행복한 체험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8.>
당분간 10월은 이 시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지인에게 시화(詩畫)를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가장 불암산 바라보기에 전망좋은 ‘자캐의 집’ 3층에서 탄생된 시입니다.
아마도 성인들 역시 주님 앞에서 늘 사랑의 찬미에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역시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의 시작입니다.
욥기 역시 앞서의 코헬렛 못지 않게 깊고 아름답습니다.
욥의 시련에 앞서 똑같은 그에 대한 묘사가 2회 나옵니다.
‘그 사람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하느님도 인정한 욥이었고 시련에 앞서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고, 사탄은 이의를 제기하자
하느님은 사탄의 제의를 수락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새삼 우리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 권한에 속해 있음을,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1차 사탄과의 게임은 극한의 고난과 시련중에도 솟아난 욥의 다음 감동스런 찬미의 고백으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평소 사랑의 찬미로 일관된 삶임을 입증하는 고백입니다.
더불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소서.”
오늘 9월 순교자 성월 마지막날 9월30일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런 성인 예로니모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역시 순교적 삶에 한결같았던 성인으로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하는 분입니다.
당대 성인의 학문의 깊이는 성 아우구스티노 외엔 아무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합니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불가타(일상적, 대중적이라는 뜻) 성서 번역이요 391년부터 406년까지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하니 성인의 진리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끈기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이 뜨거웠습니다.
성인의 편지에 나오는 권고가 심금을 울립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학교의 수호성인’,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인은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다가 420년 오늘 9월30일, 72세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욥의 경천애인의 사랑은 그대로 예수님께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은 오늘 기념하는 성 예로니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후 제자들에게 유언같은 교훈 둘을 선물하십니다.
동상이몽,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중인
철부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가장 취약하고 약하고 무력한 이들입니다.
이들을 사랑의 환대로 맞이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며 궁극에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 아버지를 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무력하고 불쌍해 보이는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며
우리의 전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얼마전 공동체 회의 결과에 ‘신의 한수’라 감탄했고 민심은 천심임을 확인하고 기뻤습니다.
엄격한 비밀투표를 통해 이심전심 가장 약해 보이나 실상은 똑똑한 수도형제를 총회대표로 선출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주님의 가르침도 소중합니다.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막았다는
기고만장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과 같은 내용의 어제 마르코 복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진리앞에 일체의 기득권이나 엘리트주의는 모두 배격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진리의 주님을 그들만의 소유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진리앞에 지극히 겸허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사랑과 찬미의 겸손한 이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진리이신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작은 이들’을 사랑하며,
진리의 사람, 찬미의 사람, 겸손의 사람, 경천애인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예레15,16)
10/1(화)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 낮에도 당신께 부르짖고, 밤에도 당신 앞에서 외치나이다.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조재형 신부)
2.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예레15,16)(이수철 신부)
10/1(화)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102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2024년 10월1일(화) 11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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