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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12일 토요일[(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12일 토요일[(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에스 4,17②-③ 참조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3,22-29
형제 여러분,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28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5(104),2-3.4-5.6-7(◎ 8ㄴ 참조)
◎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
○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과 이적을, 그분 입으로 내리신 판결을 기억하여라. ◎
○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

복음 환호송

루카 11,28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께서 세우신 이 제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정성을 다하여 마땅히 거행하는 이 거룩한 신비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을 이루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애가 3,25
당신을 바라는 이에게,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
<또는>
1코린 10,17 참조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어도 한 몸이네. 우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함께 나누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본당 교우들과 함께 야구장엘 다녀왔습니다. 돔구장이기에 더운 날씨임에도 안에는 시원하고 쾌적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주일하교 학생들과 갔었고, 이번에는 어른들과 함께 갔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지난번에는 3 : 2 로 이겼고, 이번에는 2 : 0 으로 이겼습니다. 홈팀이 이기는 경기는 경기장을 찾은 관중에게는 기분 좋은 일입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저는 사제복을 입고 갔습니다. 교우 한 분이 제게 신부님은 야구장 갈 때도 사제복 입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옷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제복이 편해서 입고 다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사제복도 기능성 사제복이 있어서 땀 흡수도 잘 되고, 금세 마르기도 해서 좋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눈이 먼 소경이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소경에게 당신은 볼 수 없는데 왜 등불을 들고 다닙니까?’ 그러자 소경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캄캄한 밤에 등불을 보면 제가 있는 걸 알고, 피해 할 겁니다.’ 제게 사제복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위해서 봉헌된 사람이고, 사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사람입니다.’라는 걸 알려 드리는 의미도 있고, 저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것은 저처럼 사제복을 입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손에 묵주 반지를 끼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차에 묵주를 걸거나, 십자가를 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집에 십자가 고상을 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유대인의 율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주는 사람입니다. 겉옷을 빌려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빌려주는 사람입니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어 주는 사람입니다. 본인의 십자가는 물론 이웃의 십자가도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기차는 연결된 객차가 많아도 늘 같은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피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뭔가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마치 바벨탑과 같습니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조건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단순한 가족의 틀을 벗어버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성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지만, 우리를 모두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이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루카 11,27-28

 

나에겐 주님의 뜻이 행복인가, 괴로움인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자로 수감돼 있는 형을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들어가 탈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교도소는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누구도 탈출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까지 죄인으로 자신을 찾으러 감옥에 들어왔으니 형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이 온 몸에 새긴 문신이 바로 그 교도소의 지도이고

완벽하게 짜인 탈출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형도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평생을 무기징역자로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형에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쫓아 감옥을 탈출하여 결국 누명을 벗게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우리 불행 안으로

들어오신 분의 뜻이 우리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복의 기준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머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은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는 분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옥이 행복이라고 믿으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을 탈출시켜 주려고 하는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합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결국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겐 장난감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닙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장난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고통스러움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뜻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참 행복의

이유인 것입니다.

 

일반 대학교 다니며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쳤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1년간 버텼습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저를 수많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압니다.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바꾸어 놓아야 행복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모욕하는 자들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제압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너무도 감동을 받아 탄성을 올립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루카 11,27)

 

그러자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여기서 여인의 행복 선언과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

(루가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경청한 바를 믿는 일’, 그리고 ‘믿는 바를 지키고 실행하는 일’ 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귀담아 듣는 것,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주님!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11.연중 제27주간 금요일                                                           갈라3,7-14 루카11,15-26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온전한 삶

                                                                    “악령 퇴치”

 

오랜만에 가뭄에 단비처럼 기쁜 소식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덕분에 새벽 산책길도 기도하며 힘차게 단숨에 걸었습니다.

한반도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 용기와 힘을 붇돋아 주는 참 좋은 노벨상 선물입니다.

국위가 마냥 선양되는 느낌에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으로 세계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얼마전 한글날을 지냈는데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 제일 기뻐하실 것입니다.

더불어 모방송국 동영상을 보며 한글날을 개천적으로 소개한 실수에 경악한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분명 한글날 노래 가사인데 자막엔 개천절이라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새벽 인터넷을 열어보니 “한강” 여성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희소식이 언론 매체마다

톱기사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노벨평화상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이 받는 노벨상입니다.

한강은 중견 작가 한승원의 딸이기도 합니다.

몇몇 대표적 기사를 소개합니다.

 

“온몸에 소름, 낙수가 바위 뚫듯, 한강 노벨문학상에 시민 환호”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쾌거, ‘그의 산문은 잔혹한 권력에 맞서는 힘’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 수상,

노벨위원회 ‘현대 산문의 혁신가’, AP ‘한국문화의 세계적 영향력 보여준다.”

“한국 노벨문학상 쾌거, ‘제조업국가의 벽 돌파, 고은-황석영이 못이룬 ’벽’ 돌파.”

 

참으로 놀라운 노벨상 소식이 일순 마음을 환히 밝히는 듯 했습니다.

이 낭보가 국민들 마음 속, 어둠속 절망의 기류들을 날려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희망과 꿈을 잃고,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잃고,

길을 잃고 방황 표류중입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세력들에 아주 취약한 마음 상태입니다.

사탄, 마귀, 악령등이 지칭하는 바 악의 세력들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어있다.

악마들은 모두 지옥을 뛰쳐 나와 지상에서 활개치고 있다.”

 

언뜻 수긍이 가는 말마디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이, 영혼의 병을 앓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작 튼튼하고 온전하고 건강해야할 정신들이, 마음들이, 영혼들이, 희망과 꿈을, 길을 잃고, 

무지의 탐욕에 병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의 일화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답을 줍니다. 우리 마음속에 희망의 빛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바로 삶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아닌 벙어리 마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벙어리 마귀가 쫓겨난 중심 자리에 예수님이 자리 잡으니 온전한 삶으로의 회복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중심한 온전한 믿음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께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닌 이들은 곡해하여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말하며,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부정적 시각을 지닌 불신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이 주어져도 믿지 못하고

또 끊임없이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벙어리 마귀축출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보여준 표징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또 하늘의 표징을 요구합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절대 영리한 사탄은 분열하지 않습니다.

악의 일치는 견고합니다.

예수님이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내면 마귀세력들의 붕괴를 뜻하니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절대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고 이들의 곡해가 참으로 터무니 없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곤 마귀세력의 축출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있는 것이다.”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위한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인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우리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고생하기 전에 유비무환,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악령에 대한 최고의 예방이자 대책입니다.

악령퇴치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낫습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나 악마는 진공을 사랑한다.” 

(Narure may abhor a vacuum but the devil loves one!)

 

자연을 하느님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 자리를 진공상태로 놔둬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를 보세요. 악령이 쫓겨난 깨끗한 진공의 자리에 성령의 주님을 모시지 않으니

더 고약한 악령 일곱이 자리함으로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지지 않습니까?

진공을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지 않으면 마음의 진공상태는 악마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어제 구입한 책이 흥미롭습니다.

꼭 읽고 싶은,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라는 책인데

제목은 멋집니다만 그러나 섣불리 어설프게 니힐리스트로 살다보면 중심 자리에 악령이 자리잡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중심 자리, 삶의 중심 자리에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반면 “십자가의 성 요한의 하느님과의 합일론”이란 어느 수도사제의 훌륭한 영성신학 박사학위 논문집도

선물받았습니다.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책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두권 다 곧 독파할 예정입니다.

 

믿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 방향, 중심,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 부재시 마귀의 우상이 이 중심 자리를 차지할 때 이보다 더 큰 재앙은, 불행은 없습니다.

이래서 다음 고백이 더욱 절실해 집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새삼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온전한 믿음의 삶이 믿는 이들의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살도록 우리를 고무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삽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한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약속한 성령을 “믿음으로” 받음으로 참으로 영육으로

온전하고 건강한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악령퇴치에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 자리에 모심으로 주님과 일치되어 성령충만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온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10/12(토)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 되새김 구절

 

1.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이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주님!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이수철 신부)

 

10/12(토)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 제113일 기도

 

복음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주님!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 2024년 10월12일(토) 6시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