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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0월 14일 월요일[(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0월 14일 월요일[(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입당송

시편 130(129),3-4 참조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본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4,22-24.26-27.31─5,1
형제 여러분,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에 따라 태어났고,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24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7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환성을 올려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자녀가 남편 가진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3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3(112),1ㄴㄷ-2.3-4.5ㄱ과 6-7(◎ 2 참조)
◎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
○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양받으소서. 주님은 모든 민족들 위에 높으시고,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
○ 누가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 같으랴?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 억눌린 이를 흙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알렐루야.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알렐루야.

복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이 정성된 제사로 저희가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11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또는>
1요한 3,2 참조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어릴 때, 저는 두 가지의 동화를 읽었습니다. 하나는 미운 오리 새끼이고, 다른 하나는 병아리와 함께 자라는 독수리입니다. 두 이야기의 동기는 비슷합니다. 원래 백조인데 오리들 틈에서 자라는 미운 오리 새끼와 원래 독수리인데 병아리들 틈에서 자라는 독수리의 이야기입니다. 어찌하다 보니 백조의 알이 오리 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백조는 생긴 모습이 오리와 다르니 오리 사이에서는 미운 오리 새끼로 불리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호수에서 우아하게 움직이는 백조들을 보았습니다. 물가에 비친 자기의 모습과 백조가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가 같은 백조들과 함께 호수에서 지내게 됩니다. 오리들이 볼 때는 미운 오리 새끼였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지냈던 독수리도 비슷합니다. 어찌하다 보니 독수리의 알이 병아리의 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독수리는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를 보면 숨어야 했습니다. 독수리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와 자기의 모습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두려움에 떨고, 숨어야 했던 독수리는 다른 독수리들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가 읽었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별과 구름을 만드셨습니다. 땅과 물과 숲을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물과 땅을 다니는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호수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백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이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독수리입니다.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유혹과 죄입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였을 겁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과 재물로 치장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날지 못하는 독수리처럼 보였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 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루카 11,29-32


주님 경외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요나가 살던 시대, 아시리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동서로는 인도에서 시작해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러시아까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 북경이나 런던 정도 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 받은 요나가 요리 조리 도망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던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느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아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믿음으로 보는 눈’>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어떤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악한 세대'라는 말은 <마태오복음>에 비추어 보면,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1,16 참조). 

사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달려왔건만, 막상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지역에서는 이미 그들 가운데 와 계신 지혜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분을 시험하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을 말하실 뿐입니다.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고 외치는 회개의 때가 왔다는 것과 그가 바다에 빠져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 곧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표징으로 말씀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루카 11,2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오늘도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는 눈을 주시어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0.13.연중 제28주일(군인주일)  

                                                                                                     지혜7,7-11 히브4,12-13 마르10,17-30

 

                                        지혜롭고 영원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

                                           “기도하라, 공부하라, 따라라”

 

“주님,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주소서.

 저희가 기뻐하리이다.”(시편90,14)

 

화답송 후렴이 진리입니다.

주님의 자애가 우리를 채울 때 참 기쁨과 행복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어지럽고 험한 세상일수록 추구할 바 지혜로운 삶, 영원한 삶, 행복한 삶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을 찾는 고귀한 인간 품위의 거룩한 삶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의 고백이 더욱 감동을 줍니다. 

 

“세계 곳곳에 전쟁으로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가는데 무슨 잔치. 수상의 기쁨은 그냥 조용히 간직하겠다."

 

말그대로 고결한 인간 품위와 예의의 반영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참으로 지혜의 샘이신, 영원한 생명이신, 참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항구히 사랑으로 섬길 때

비로소 지혜롭고, 영원하고, 행복한 삶입니다.

 

9월부터 10월 지금까지 저를 참으로 행복하게 한 짧은 자작 두 편의 시를 또 나눕니다.

참 많이 나눴지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늘 꽃같은 삶, 주님앞에 서듯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 자유로운 삶,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 저는 참으로 지혜롭고 영원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비결을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첫째, “기도하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람이라해서 다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사람입니다.

 

하늘의 주님께 기도하라고 직립인간直立人間에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어제 새로 뽑힌 추기경들에 대한 교황님의 환영사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을 특징짓는 세 자세를 강조했는데

그대로 기도의 자세입니다. 

“눈은 들어올리고, 손은 모으고, 발은 벗은”(eyes raised, hands joined, feet bare),

제가 바치는 만세칠창과 흡사한 자세입니다.

 

왜 기도하느냐?

기도할 때 모든 선물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기 때문입니다.

선물중의 참 좋은 선물이 지혜입니다.

 

주님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가 바로 지혜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밝힙니다.

솔로몬의 고백입니다만 정말 공감이 가고 나의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했다.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고,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못한다.

 

온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지혜 예찬입니다. 이런 지혜는 그대로 주님의 현존입니다.

지혜를 참으로 체험한 자의 고백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추구할 바 이런 지혜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이런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이런 지혜입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주님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평생공부가 주님 공부요 구체적으로 하느님 말씀공부입니다.

어제 복음의 요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참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지혜입니다.

말씀은 빛이요 생명이요 영이요 주님의 현존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더욱 하느님 말씀 공부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을 북돋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듯 지혜를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사랑하여 지킬수록 삶은 더욱 진실해지고 순수해지고 단순해지고 투명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정화되고 성화되며 위로와 치유도 받습니다.

 

셋째, “따라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가 참으로 우리에게는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그 좋은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켰는데 여전히 영원한 생명에 목말라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참으로 적절한 극단적 처방을 내리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아마도 이 시험을 통과할 부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부자는 역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났다 합니다.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니라 많은 재물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무거운 삶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거처럼 어렵다’

탄식하듯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물었고 주님은 부자에게도 구원의 은총이 가능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계명을 지켜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과 지닌 것을 나누고 섬기며 주님을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부자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관대해져 나눔과 섬김으로 주님을 따를 때 구원입니다.

사실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고 사랑이 많아 나누기를 좋아하는 부자들도 있기 마련이며

이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두를 버리고 따른 이에게 축복을 말씀하십니다만 모두가 그렇게 불림받은 것은 아닙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정도만큼 사랑과 지혜로 나눔과 섬김의 삶을 묵묵히 실천하면서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우리 삶은 안주의 삶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여정의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생각없이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욕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나누고 섬기면서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니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나눔, 섬김, 따름, 비움”의 삶은 얼마나 멋진 삶인지요!

이런 삶이야 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요, 이미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 내적 부요의 삶, 영원한 삶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지혜롭게, 자유롭게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버리고, 나누고, 섬기고, 비우고, 주님을 따르면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중 일치하는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자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라, 공부하라, 따라라”는 주님의 당부를 힘껏, 한결같이 지키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10/14(월)[(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서로를 믿을 수 없고서로를 이용하려 하고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보라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조재형 신부)

 

2.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아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루카 11,2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오늘도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는 눈을 주시어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나눔, 섬김, 따름, 비움”의 삶은 얼마나 멋진 삶인지요!

이런 삶이야 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요, 이미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 내적 부요의 삶, 영원한 삶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지혜롭게, 자유롭게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이수철 신부)

 

10/14(월)[(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제115일 기도

 

복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루카 11,29)

 

주님!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오늘도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는 눈을 주시어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0월14일(월) 17시4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