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1월 11일 월요일[(백)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믿음직한 사제를 세우리니, 그는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리라.
본기도
복된 마르티노 주교는 그 삶과 죽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으니
저희에게 놀라우신 은총을 새롭게 베푸시어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시작입니다.1,1-9
1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2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4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5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7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8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9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61,1-3ㄹ)와 복음(마태 25,31-40)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거룩한 마르티노 주교를 공경하며 주님께 기꺼이 바치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저희를 주님께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일치의 성사로 힘을 얻은 저희가
모든 일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복된 마르티노 주교를 본받아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봉헌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미국과 한국의 집 구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에는 ‘현관(玄關)’이 있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옵니다. 현관에는 신발장이 있고, 우산 거치대가 있고, 구둣주걱이 있습니다. 현관은 ‘정화(淨化)’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현관을 지나면서 모두 털어버리면 좋겠습니다. 현관을 통해서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 가정이 작은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도 현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수(聖水)’입니다. 달라스 성당에는 성전 입구에 세례대가 있습니다. 세례대에는 늘 일정량의 물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성수를 찍거나, 세례대에 손을 적시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겁니다. 가톨릭 교리 중에 ‘연옥’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연옥은 일종의 현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성인들의 통공과 우리의 기도가 함께 하면 연옥 영혼들은 정화될 겁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초대받을 겁니다.
제가 있는 사제관은 복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계단에 ‘난관(欄干)이 있습니다. 난간은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실내와 실외, 안전과 위험, 자유와 제한 사이의 경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난간은 인간의 본질적인 경계 설정 욕구를 반영합니다. 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자유를 제한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난간을 넘어서거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욕구를 어떻게 경험할까요?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난간을 뛰어넘었습니다. 난간은 보호자나 사회적 안전망과 같은 역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어려움에서 안전을 찾을 때 '난간'과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보이지 않는 난간이 있으며, 우리는 항상 어떤 경계 내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간은 규칙과 질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규범과 법적 ‘난간’을 세워 둡니다. 이러한 난간이 보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원로는 현관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감독은 난간과 같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원로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독은 세상 속에 있는 교우들이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원로와 감독의 역할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다른 하나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이렇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합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로와 감독에게 요구되는 덕목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난하고 평가하기보다는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복음: 루카 17,1-6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 마음은...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 얼마나 섬뜩한지 모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루카 17,2)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진정한 믿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잘못으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일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없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씨' 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져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1.10.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1열왕17,10-16 히브9,24-28 마르12,38-44
봉헌의 여정
“회개와 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46,1ㄴ)
가슴 섬찟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제 나눈 강론은 “성전정화”였고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주제는 “예수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뭔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불길한 느낌을 받습니다.
성전정화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어제 저녁 식사중 수도원에 잠시 머물고 있는 교구 신부님의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둔
애로사항과 더불어 수사님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이야기를 잠시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교회는 물론이고 나라에 청년이, 젊은이들이 없구나! 이를 어쩌나!” 탄식과 더불어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잃고, 길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청년들이 생각났습니다.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세계 청년대회 주제 성구가 우리의 용기를 붇돋웁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신부님의 “전 교회가 회개하는 자세로 청년대회에 임해야 한다,
교회가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요지의 말에 전폭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새삼 건물 잘 짓는 것보다 사람을 잘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성전정화와 반드시 함께 가야할 “주님 중심의 회개와 봉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성전파괴에 대한 제자와 예수님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감탄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즉각적인 주님의 답변이 우리의 교회 현실을 들여다 보게 합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내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 있는 모래위 교회 공동체라면 그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건물도 텅 비워지고
날로 쇠락해 질 것입니다.
요즘 교회는 물론이고 곳곳에 빈 건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도대체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삼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돈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전건물이 아니라 공동체 건물의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이, 기도와 공부가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내적으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사회 현실입니다. 앞서 복음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장터에서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성직자들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진실과 겸손이 결핍된 무지와 허영의 율법학자들입니다.
무지와 탐욕과 더불어 내적으로 열정과 순수도 사라진, 길을 잃은 병든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등장하는 부자들의 헌금 장면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들과 가난한이들이 공존하는, 여전히 교회내의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빈부의 격차보다 더 심각한 것이 이념에 의한 좌우, 진보와 보수의 분열입니다.
흡사 심리적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여전히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에 이어 내 신원의 고백입니다.
만세칠창중 더욱 정성을 쏟는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최악의 전쟁은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고 평화가 최상의 가치임을 절감하는 현실입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평화의 전사다!” 만세칠창후 고백하는 제 신원입니다.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습니다. 늘 깨어 우리를 살펴 보시며 돌보시고 계신 주님을 상징하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늘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는 노력으로 단풍 장엄하게 물든 불암산을 볼 때 마다 되뇌는 세 고백입니다.
9-11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가을에 저를 행복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성전안에 헌금하던 부자들도 가난한 과부도 주님께서 주시하고 계심을 까맣게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는 장면은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가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당당하게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들과 렙톤 두 닢을 부끄러이 바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팔을 들어주었던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팔을 들어줍니다.
또 인용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언젠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가난한 자매가 꽃 한송이를 들고 왔을 때 드린, 하루 종일 저를 행복하게 했던
답시도 생각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아마도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이보다 더 기뻐했을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하느님 향한 순수한 믿음의 봉헌에, 순수한 사랑의 봉헌에 감동하신 주님의 고백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를 대접하던 사렙타의 과부 그 이상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빛나는 회개의 표지, 봉헌의 표지인 가난한 과부입니다.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시니 이를 교육의 기회로 삼는 주님의 처사가 참 기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누가 내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참 부자인지 성찰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어 참 부자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가진 것들중 극히 작은 일부를 바친 인색한 부자들보다 가진 것을 다 바친 신망애(信望愛)의 과부가
참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부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 예수님 전부를 봉헌한 하느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히브리서 말씀도 연상됩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티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당신을 고대하던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단 한 번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봉헌의 여정 중심에 영원한 봉헌의 모범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이런 주님의 봉헌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바치신 봉헌에 참여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난한 과부요 우리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는 가난한 과부는 교회의 빛나는 회개의 표지,
봉헌의 표지가 됩니다.
정말 절박한 것은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 성전의 봉헌이 아니라 회개의 봉헌입니다.
깨어 있는 성전 사제라면 생활비 전부를 바친 가난한 과부의 삶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가난한 과부를 착취한 것같은 봉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라면 성전 사제의 죄가 참으로 엄중합니다.
정말 건물성전관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공동체성전관리가 우선적임을 봅니다.
가난한 과부들의 헌금이 모인 성전사제의 생활비라면 정말 써야 할때면 아낌없이 써야 하겠지만
절제는 몸에 배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성전파괴의 예언도 작금의 교회가 내적타락과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라는,
우리를 회개에로 부르시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정말 교회나 수도원, 성지들의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들을 보면 가난한 신자들이 연상되고
우려하는 마음 큽니다.
정말 우선적인 것이 건물성전보다 공동체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유럽 성지들을 순례할 때도 옛 신자들의 크고 순수한 믿음에 감격하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가난한
민초 신자들의 땀과 피를 흘렸을까 생각하면 마음 편치 않을 때도 참 많습니다.
병들고 시들어 죽어가는 공동체성전인데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성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참으로 믿는 이들의 순례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이요 봉헌의 여정중의 우리 삶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 중심의 교회공동체로 끊임없이 정화되고 숙성(熟成)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이수철 신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1월11일(월) 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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