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2월 10일 화요일[(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2월 10일 화요일[(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로레토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즈카 14,5.7 참조
보라, 주님이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리니, 그날에는 큰 빛이 비치리라.

본기도

하느님,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으니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성탄을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0,1-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6(95),1-2.3과 10ㄱㄷ.11-12.13(◎ 이사 40,10 참조)
◎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
○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겨레들에게 말하여라. “주님은 임금이시다. 그분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신다.” ◎
○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 뛰고, 숲속의 나무들도 모두 환호하여라. ◎
○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비천한 저희가 드리는 기도와 제물을 굽어보시어
아무런 공덕이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보호하시며 도와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2티모 4,8 참조
의로운 심판관은 당신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 사람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본당에서 죽음 교육이 있었습니다. 죽음 교육의 첫 시간에 김소엽 시인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 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후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죽음 교육의 목적은 잘 사는 방법을 찾는 거였습니다. 죽음 교육의 목적은 잘 익어가는 거였습니다. 죽음 교육에서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았습니다. 좋았던 일, 보람 있었던 일, 행복했던 시간을 찾아보았습니다. 괴로웠던 일, 슬펐던 일, 아쉬웠던 일, 불행했던 시간을 찾아보았습니다.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어우러지는 쌍곡선이라는 말처럼 많은 분이 행복했던 기억, 불행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교적 평탄했던 저의 인생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희망과 절망도 있었습니다. 인생의 그래프에서 안 좋았던 시간은 극복하고, 좋았던 시간은 반복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죽음 교육에서 솔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솔개는 장수하는 새에 속한다고 합니다. 40살 무렵이 되면 솔개는 부리는 커지고, 날개는 무거워지고, 발톱이 무디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솔개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서 6개월간 인고의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먼저 커진 부리를 바위에다 부딪친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리가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부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 나온 부리로 무디어진 발톱을 뽑아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발톱이 나온다고 합니다. 무거워진 날개 깃털을 뽑아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깃털이 날개를 덮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면 솔개는 새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다음 30년을 힘차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솔개처럼 살아야 합니다. 솔개가 부리를 바위에 부딪쳐서 없애 버리듯이 낡은, 우리의 습성을 없애야 합니다. 솔개가 약해진 발톱을 뽑아 버리듯이 나약한 우리의 습성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솔개가 무거워진 깃털을 뽑아 버리듯이 못된 우리의 습성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그날이 오면 유배가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이 오면 평등의 세상, 자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제가 살았던 서울도, 지금 살고 있는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깊다면 서울도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언덕이 높다면 지금 살고 있는 달라스도 그날이 아닙니다. 골짜기가 메워진다면, 언덕이 평평해진다면 어디에 있어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날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착한 목자 이야길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공도 실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함과 가난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행운과 좌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4년 다해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18,12-14

 

이번 판공 성사는 이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대림절만 되면 각 본당 마다 성탄 판공 성사가 운영됩니다. 판공 성사 표까지 배부가 되고,

봤는지 안 봤는지 체크가 되니, 거의 반강제적인 제도라고 불평하실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발걸음을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려놓고자 하는

은혜로운 제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특강 다니는 곳 마다 목청껏 외치고 있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안에 자비하신 주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길 잃은 어린 양 한마리 되찾는 것을 당신 삶의 가장 큰 보람이요 기쁨으로

여기시는 주님께서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 12-13)

 

지난 세월 고백소 안에서 보낸 시간을 돌아보니 참으로 맞는 말씀 같습니다.

낚시꾼들이 잔챙이를 잡을 때는 기분이 별로지만, 대어를 낚으면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

고백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들이 큰 죄를 털어놓을수록 기쁩니다.

30년 냉담자의 고백을 듣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교우들이 걱정들 하시는데, 고백소 안에 계신 신부님께서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누군지를 알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이 엄청난 죄를 들으시고 충격받지 않으실까?

그래서 어떤 분들은 목소리를 평소와 다르게 변조까지 하십니다.

 

부탁드리건데 절대 그런 걱정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백 사제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대신해서 죄를 사해드리고,

교우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새 삶을 시작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님께서는 우리로부터 값지고 좋은 선물도 기쁘게 받으시지만,

우리의 죄, 수치스러움, 꿈에도 생각나면 부끄러운 흑역사, 혹독한 실패, 이런 모든

부정적인 것들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는 그 작업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고백소 안에 앉아 우리 교우들이 이렇게 고백성사를 보셨으면 하는 것을 몇가지 적어봤습니다.

 

1. 내 죄만 고백한다.

2. 그분의 죄는 그분이 고백하도록 놔둔다.

3. 그분의 부족함은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긴다.

4. 고백 사제 뒤에는 자비하신 하느님도 함께 앉아 계심을 굳게 믿는다.

5. 주님께서 내 죄를 적당히가 아니라 온전히 사해주심을 확신한다.

6. 고백 사제들은 들은 바를 신속히 망각한다는 것을 믿고 안심한다.

7. 제일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죄부터 고백한다.

 

이번 성탄,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에게서 탄생하셨듯이 우리 각자 안에서도 탄생하시기 위해

우리 각자 영혼의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 영혼을 말끔히 정화시키고, 매일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도

계속 정화시킨다면,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거룩하고 흠없는 지성소,

구세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적당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

 

2024년 다해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18,12-14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 도움은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의 몫

 

만약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환자를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해 볼까요? 만약 이 간호사가 자신이 구해 준 남성의 가족에게

계속 금전을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자기 아버지를 구해 준 이 사람에게 계속 돈을 빌려주거나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고마움만으로는 마음의 문이 지속해서 열리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어느 용병대장이 적으로부터 한 도시를 구해주었습니다. 이에 성내의 선량한 시민은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갖가지 방안을 짜냈습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까? 금전으로 보답하는 것은 너무 경박해 보일 듯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금, 은을 주더라도 어찌 성내 시민을 지켜 준 공적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이 용병 대장을 성의 영주로 임명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곧 또 다른 이들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반박했습니다.

 

사람들은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를 목매달아 죽인 후에 우리의 수호성인으로 모시자.”

결국 용병 대장이 받은 보답은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그 사람이 자신에게 고맙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지혜로운 사람은 고마운 존재가 되기보다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상대가 당신에게 고마워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의지하게 만들어라.

의지하는 것은 오래 기억되지만, 감사의 마음은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에서 목을 축이면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아무리 맛있는 과일을 먹어도 먹고 난 뒤

껍질을 쓰레기통에 던진다.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더 이상 예의도 존경도 사라진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할 때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 또한 교만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에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고마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짐’과 같습니다. 보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짐을 지워주면 지어줄수록 부담만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줄기차게 얻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열어 모든 것을 얻어내려면

그분께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그분께 어떻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한 마리 양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양들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도움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영화 ‘인턴’은 70세의 은퇴한 벤 휘태커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온라인 패션 회사의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시작됩니다. 벤은 회사의 젊고 재능 있는 CEO 줄스 오스틴과 함께

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줄스가 그를 부서 이동시키려 하며 벤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벤은 경험과 지혜, 따뜻한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으며 점차 줄스의

신뢰도 얻게 됩니다. 줄스에게 필요한 인생의 조언을 해 주며 회사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기 때문입니다. 

 

줄스는 사업과 가정을 동시에 관리하며 겪는 스트레스와 고립 속에서 벤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벤은 그녀의 삶에 조언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며 줄스가 자신의 약점과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벤은 줄스에게 단순한 인턴이 아닌,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멘토로 자리잡습니다. 결국 줄스는 벤이 자기 삶과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닫고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줄스는 회사에서는 벤이 인턴이지만, 인생에서는

자신이 인턴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에 인생을 오래 산 벤의 품격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당신 십자가를

양보하였습니다. 시몬은 그렇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는 죽어서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계속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청하기 이전에 내가 그분의 필요에 관심 두는 사람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12.9.월요일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창세3,9-15.20 에페1,3-6.11-12 루카1,26-38

 

믿음의 마리아 성모님 

“정주, 찬양, 순종”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시편98,1ㄱㄴ)

 

세상이 존속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기적들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작금의 위기를 맞이한 대한민국에게 오늘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한국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호자 마리아 성모님이기 때문입니다. 

 

기상하자마자 바치는 만세칠창중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는 더욱 각별하고 간절해졌습니다.

한국교회는 물론 미국, 스페인, 포르투칼, 브라질, 필리핀, 니카라과 등의 여러나라 및 성당에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모십니다.

 

오늘 대축일의 기원은 5세기 동방교회에 속한 시리아에서 시작되어, 7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방교회에서

널리 확산되면서 보편화됩니다. 서방교회에서는 8세기부터 이 축일을 12월8일 기념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남부, 노르망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을 거쳐 최종적으로 로마로 전파됩니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 축일을 로마 전례력에 삽입하였고, 1708년 12월6일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대축일로 격상시킵니다. 

 

마침내 17세기 마리아가 원죄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규정해 달라는

신자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는 교황 무류성에 따라

회칙 <형언할수 없는 하느님>에 의해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를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새삼 가톨릭교회의 뿌리깊은 전통이 자랑스럽고 신뢰가 갑니다. 한국교회는 대희년이었던 2000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다시 한번 성모님께 한국교회를 봉헌했고,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권고에 따라 2015년부터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만 한국교회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오늘 복음과 두개의 독서가 답을 줍니다. 교황님은 어제 대축일 강론중 오늘 복음을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의 하나라고 강조하셨고 공감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약간 시간만 내어 루카 복음을 들여다 보고, 이 장면을 읽는다면,

나는 여러분들 역시, ‘좋다’, ‘참 좋다’할 것이라 확신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역시 사제서품후 35년동안 수없이 이 복음을 접하고 강론했지만 늘 신선한 충격에 새로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1,28)라는 대목은

고백성사시 말씀처방전의 보속으로 참 많이 써드렸고,

어느 수녀로부터는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입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믿음의 어머니 성모님으로부터 셋을 배웁니다.

 

첫째, 정주입니다.

정주의 믿음, 정주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언제나 제자리의 정주에 깨어 충실했던 마리아였습니다.

유혹에 빠져 정주의 제자리에서 벗어날 때 줄줄이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하와와 아담 부부가 그 좋은 증거가 됩니다. 

 

“너 어디 있느냐?”

 

우리 모두가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아담을 찾았을 때 아담은 두려움에 숨어서 나타나지 못합니다.

정주의 제자리에 충실했다면 “예, 여기 있습니다.”대답하고 곧장 주님앞에 나섰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평생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정주의 제자리에서 벗어나자 불순종의 죄를 짓자마자 하느님의 책임 추궁에 서로가 책임전가에 급급합니다.

급기야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저 여자가..”라며 하느님과 아내에게 탓을 돌리는 아담입니다.

서로간 관계의 완전 파탄입니다. 죄의 폐해가 너무 큽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믿음의 마리아, 정주의 마리아입니다.

눈밝은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늘 제자리의 정주에 충실하며 책임을 다하는

마리아를 친히 방문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축복을 확인하신후

속내를 다 밝히시니 주님이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여 눈여겨 보아둔 마리아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찬양입니다.

찬양의 믿음, 찬양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믿음을 날로 깊게 합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모두가 찬양과 감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찬양감사노래는

우리 가톨릭교회가 저녁기도 끝무렵에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성모님과 함께 바칩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1,3-14)의 찬가는 가톨릭교회가 매주 월요일 저녁기도 성무일도때 바치는

찬양감사가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문장으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을 노래합니다. 

 

마리아 성모님 마음에도 쏙들었을 내용에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성모님과 성인들과 함께 끊임없이 하느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주옥같은 은혜 충만한 내용들입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의 믿음, 순종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 성모님의 믿음은 정주에서

침묵의 관상과 경청에서 그리고 겸손한 순종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침묵, 경청, 겸손, 순종 모든 영적덕목을 갖춘 믿음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사랑과 신뢰를 받은 마리아 성모님인지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우리 가톨릭교회의 어머니들의 영원한 롤모델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내에는 예나 이제나 성모님을 닮은 성녀급의 어머님들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차질없이 이뤄지게 한 다음 마리아의 겸손한 믿음의 순종이 얼마나

고맙고 감격하셨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역시 이런 순종의 고백을 하며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아멘.


12/10(화) [(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분명 골짜기가 있습니다. 학력, 지역, 이념, 직업, 계층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서 넘어가기도 힘들고, 넘어오려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기도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듯이 우리의 삶도 짧은데 우리는 골짜기를 메우기보다는 더 깊게 만들곤 합니다. 이런 골짜기를 메우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산과 언덕이 있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바벨탑은 교만, 욕심, 허영, 위선, 가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탑을 낮추어 평평하게 하는 길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조재형 신부)

 

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 12-13)(양승국 신부)

 

3. 우리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당신 십자가를

양보하였습니다. 시몬은 그렇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는 죽어서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계속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청하기 이전에 내가 그분의 필요에 관심 두는 사람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전삼용 신부)

 

4. 17세기 마리아가 원죄없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규정해 달라는

신자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는 교황 무류성에 따라

회칙 <형언할수 없는 하느님>에 의해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를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새삼 가톨릭교회의 뿌리깊은 전통이 자랑스럽고 신뢰가 갑니다. 한국교회는 대희년이었던 2000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다시 한번 성모님께 한국교회를 봉헌했고,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권고에 따라 2015년부터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만 한국교회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이수철 신부)

 

12/10(화) [(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제 172-42일 기도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길 잃어 방황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기다리십니다.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10일(화) 6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