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11일 수요일[(자) 대림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오시어, 어둠 속에 숨은 것을 밝히시고, 모든 민족들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리라.
본기도
주 그리스도 오실 길을 마련하라 하셨으니
나약한 저희가 천상의 영약으로 힘을 얻어
구원의 길을 닦아 나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복음 환호송
○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예물을 정성껏 봉헌하며 비오니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신비의 거행으로
저희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죽음 교육에서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짧은 시인데 깊은 여운을 주는 시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노를 젓는 일이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노를 젓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물질, 성공, 권력, 업적이라는 방향을 향해서 노를 저으면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참된 행복을 향해 나갈 수 없습니다. 노를 놓쳐서 잠시 멈추면 비로소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사목이라는 노를 저어서 33년을 달려왔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청년부와 주일학교를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행사하고,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돌아보면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사목회를 중심으로 교우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많은 행사가 있었고, 만남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말씀이 부족했고, 영적으로 메말랐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는 교구청을 중심으로 교구 신자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교육이 있었고, 행사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교우들이 바라는 것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역시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 있을 때는 코로나 팬데믹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이라는 노를 저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늘 노심초사였습니다. 달라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이라는 노를 젓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직에서 젓는 마지막 노가 될 수 있습니다. 점시 노를 멈추고 말씀과 영성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야겠습니다.
‘물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벌레는 물속에서 살며 물 표면을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물속 생활에 익숙한 물벌레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떠나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물 위로 올라간 친구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물벌레 중 하나가 물 표면을 향해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물을 떠나 물 밖으로 나온 물벌레는 기다리고 있던 변화를 맞이하며 잠자리로 변태하게 됩니다. 잠자리가 된 물벌레는 하늘을 날며 새로운 세상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속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물속에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겪은 변화를 알리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변화와 성장,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신비로움과 연결됩니다. 물벌레에서 잠자리로의 변태는 인간 삶의 단계적 변화를 상징하기도 하며, 종교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부활, 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물벌레가 잠자리로 변하는 과정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짐과 멍에를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짐과 멍에일까요? 강도 맞은 이웃을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지심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수오지심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양지심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분별하는 시비지심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도 함께 가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열정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들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과 멍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 시기를 지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업적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모두 용서하신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려던 짐과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4년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11,28-30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위로 올라갑니다!
때로 매일 매일 우리에게 배달되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독서 말씀과 복음 말씀은 온통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위로로 가득합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여기 쑤시고 저기 아픈, 저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지니게 해줍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야 40,30-31)
맞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은 영원히 청춘이십니다. 언제나 새롭고 활기로
가득하십니다. 주님은 노쇠하거나 은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안에 길이 머무는 우리 역시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늙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라면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춘을 살수 있습니다.
비록 세월의 흐름 앞에 너나할 것 없이 약해지고 작아지마, 삶은 점점 위축되고 결국
소멸되겠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온몸으로 실감하는 바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큰 자비와 은총을 주셔서,
상상을 초월할 강철 체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꼭두새벽부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엄청 바쁩니다. 일이 눈에 보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피정 집 운영, 미사, 기도, 고백성사,
신앙상담, 특강, 원고 작성, 청소, 수리, 시장, 주방...그 와중에 물때가 좋으면 해루질에 낚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파김치처럼 되지만, 놀랍게도 하룻밤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에너지가 백퍼센트 충전되어 원상복귀됩니다.
나름 열심히 살려고 하니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가 봅니다.
제 체험상 나이들수록 더 움직여야 합니다. 좀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근심 걱정도 주님께 맡기고, 건강 문제도 주님께 맡기고, 병고도 주님께 맡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주님께 맡기고, 그렇게 모든 것 맡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자요 결정적인 위로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런 고통 저런 상처를 이고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세파에 지칠 때마다, 그래서 걷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바다처럼 관대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한없이 따뜻하고 편안한 하느님의 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대로 그분은 에너지 충전소입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십니다.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십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2024년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갑니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참으로 복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안식'을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순한 쉼이 아니라 ‘구원’과 동의어입니다(히브 3,11.18; 4,1.3.5.10-11; 묵시 14,13 참조).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는 ‘안식’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안식’(구원)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가지고 계신 분만이 주실 수 있으니, 주시는 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당신이 구원자라는 선언이요, '안식'(구원)은 당신이 선사하는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주시기 위해 먼저 초대하십니다.
“나에게 오너라.” 라는 문구는 현인들이 자신의 학교에 와서 지혜를 배우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전형 구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 부르는 대상은 주로 ‘배우지 못한 자들’(집회 51,23)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 모두'를 부르십니다.
이들은 우선 23장의 '무겁고 힘겨운 짐'(23,4)에서 알 수 있듯이, 613개의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단순히 지혜를 전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안식'(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주겠다”라고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그것은 바로 당신의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사실 ‘멍에’는 ‘순종’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사도 15,10; 갈라 5,1).
그러니 예수님께 순종하며 가르침을 받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으로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바로 ‘예수님, 당신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앞에 항상 지니셨던 그 마음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지니고 계신 그분으로부터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고 북돋아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지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주시는 스승만인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그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을 함께 가실 뿐만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마태 11,29)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배움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그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4.12.10.대림 제2주간 화요일
이사40,1-11 마태18,12-14
착한 목자 주님
“희망과 기쁨, 위로와 연민, 온유와 겸손”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교회가 시복시성을 위해 노력중인 ‘하느님의 종’, 착한 목자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묘비명입니다.
믿는 이들 역시 늘 착한 목자 주님을 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전 수도원 분원장 직을 맡았을 때 “공동체의 장상이기 보다는 형제들을 섬기는 목자로 생각하라.”는
장상의 충고도 잊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착한목자 주님의 진면목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초점은 “길 잃은 양 한 마리”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마리가 있는 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복음에서 하나이지만 실제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곳곳에 길을, 희망을, 꿈을, 비전을 잃고 유혹에 빠져 방황하고 죄를 짓고 병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주님을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 각자 잃은 양이 되지 않기 위해 늘 길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찾는 노력도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더 나아가 참으로 바람직한 삶은 잃은 양을 찾는 착한목자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이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착한목자 주님이십니다. 앞서의 복음 내용도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곳곳에 길을 잃은 작은 이들이요 우리 또한 여기에 속할 수도 있겠고
모두가 하느님의 연민의 구원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목자 주님 중심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있는 아흡아홉에,
하나 만이 공동체로부터 떠나 방황하는 길잃은 양이 된 것입니다.
새삼 어디에 있던 주님의 공동체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자각이 얼마나 큰 위로와 안도감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형제들과의 관계가 깊고 좋으면 어디나 지상천국의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교황님도 늘 강조하는 것이 “더불어(together)”의 여정입니다. 고립단절의 혼자가 길잃은 양이요 지옥입니다.
공동체 안에 함께 살아도 순전히 고립단절의 삶이라면 길잃은 양이요 지옥같은 삶입니다.
그러니 관계의 욕구는, 공동체 소속의 욕구는, 길이자 희망이신 착한목자 주님을 찾는 욕구는
누구나의 근본적, 생래적 욕구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늘 이런 길잃는 작은 이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찾아 나섭니다.
어찌보면 우리들은 모두 길잃은 작은 이들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이런 길잃은 작은 이들을 불철주야 찾아 나선 착한목자의 사랑에 응답하여 착한목자 주님을 찾는 적극적이고
항구한 응답이 절대적입니다.
대림시기는 바로 우리 모두가 우리를 찾아 오시는 착한목자 주님을 기다릴 뿐 아니라 마중 나가는 시기입니다.
대림시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마디는 “오시는 주님”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이 공동체 안팎의 모든 형제들이 온통 찬미의 기쁨으로 깨어 가슴 활짝 열고 오시는
착한목자 주님을 맞이할 것을 촉구합니다.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그분은 오시어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
공동체 안팎의, 길잃은 모든 이들이 분발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대림의 공동체에 합류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화답송에 앞서 이사야서도 우리의 참여를 촉구합니다.
“기쁜 소식은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귀환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온처럼, 예루살렘처럼 대림의 주님을 맞이하라 하십니다.
“보라,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모두를 품에 안으시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 대림의 착한목자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을 받은 이사야는 또 우리에게 세가지 요청을 하십니다. 1.위로와 2.주님을 길을 닦는 것,
3.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착한목자 주님은 위로의 주님입니다. 길잃은 작은 이들을 물론이고 위로의 구원을 갈망합니다.
정작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것은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아라.”
대림시기, 참으로 내적으로 회개하여 치유되고 정화되고 성화되어 온유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이며 바로 대림시기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입니다.
이어 본연의 인간모습을 되찾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하느님 중심을 확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무지와 무의미, 허무의 심연에 함몰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새삼 은총의 대림시기 하느님 말씀과 하나되는 공부가 얼마나 본질적 필수공부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12/11(수) [(자)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려던 짐과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조재형 신부)
2. 근심 걱정도 주님께 맡기고, 건강 문제도 주님께 맡기고, 병고도 주님께 맡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주님께 맡기고, 그렇게 모든 것 맡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모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대림시기, 참으로 내적으로 회개하여 치유되고 정화되고 성화되어 온유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이며 바로 대림시기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입니다.
이어 본연의 인간모습을 되찾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하느님 중심을 확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12/11(수) [(자)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 173-43일 기도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11일(수) 4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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