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15일 주일[(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생명의 샘이시요 기쁨의 샘이신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의 길을 거침없이 달려 온 세상에 구세주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기로 다짐하며, 기꺼운 자선 행위로 이웃 사랑을 기쁘게 실천합시다.
입당송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본기도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오니
저희가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18ㄱ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 높으신 그 이름을 선포하여라. ◎
○ 위업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이 하신 일 온 세상에 알려라. 시온 사람들아,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4,4-7
형제 여러분,
4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0-18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이신 주님,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굳건한 믿음을 주시어, 삶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하시며, 희망과 신뢰로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의 순례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2. 세계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통치자이신 주님, 세계 지도자들에게 일치와 화해의 마음을 주시어, 세계와 자기 나라에 닥친 어려움을 복음 정신으로 이겨 내고, 주님의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3. 자선 주일을 맞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세상 모든 이를 굽어살피시어,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실 앞에서 가난으로 더욱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시며, 저희가 연대의 힘으로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모든 가정에 강복하시어, 여러 사정으로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기도 안에서 하나 되고 가족의 소중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신비의 거행으로
저희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힘을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부주임 신부님이 새로운 미용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장소는 시온마켓 2층이라고 했습니다. 시온마켓은 자주 갔었고, 2층에 있는 미용실도 금세 찾을 것 같았습니다. 조금 여유 있게 올라갔는데 20분을 돌아도 미용실을 찾지 못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한테 전화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시온마켓 2층은 미국 몰하고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로 가면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다시 내려가서 한국 몰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약속 시간 전에 미용실에 도착했지만 당황했습니다. 미국 몰하고, 한국 몰하고 입구가 다른데 급한 성격에 미국 몰로 올라가서 그런 실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부주임 신부님과의 통화로 약속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성체를 가면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10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자매님이 곧 회복되어서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리가 아파서 누워있었고, 사정이 있어서 재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근육이 약해졌고,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봉성체를 마치고 자매님에게 앞으로 남은 날들이 많은데 계속 이렇게 누워있으면 자매님도, 가족들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재활 치료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과 가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지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군중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자선을 베풀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정직하게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군사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힘을 부당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력은 적에게 사용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거침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당당함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뜨거운 열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오시기로 한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이웃에게 나누는 것,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정직한 것, 정의를 실천하는 것, 겸손한 삶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3주일: 다해
복음: 루카 3,10-18
구세주의 찬란한 별빛을 뵙고자 한다면...
다들 요즘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십니까?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니 서민 경제도 바닥이고,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자영업자들,
서민들 다들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언제 어디서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만사형통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때도,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토록 어려운 국면에 처한 우리 현실 안에도 주님께서는 반드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꼭 그렇게 될 것을 믿고, 기도하는 대림시기 보내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아래쪽 숙소 거실 천장에 배관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끝낸 다음,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부르면 인건비 엄청나서 혼자서 살살 하고 있었는데, 늦게 피정에 도착하신 분이
문을 확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열심히 도배하고 있는 저를 보신 형제님이 대뜸 묻습니다.
“관리장님 되시나요? 제가 좀 늦었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제가 활짝 웃으면서 “네, 잘 오셨습니다. 제일 꼭대기 성당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강의 시간이 되서 대충 일 마무리 하고 옷 갈아입고 강의하러 갔더니
아까 그 형제님 깜짝 놀라시며 미안해하셨습니다.
저는 올해로 수도 생활 40년 째인데...돌아보니 수도원 안에서 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쾌적한 사무실 컴퓨터 앞에서 주로 일을 했고, 매일 하는 일이 회의하고 결재하고 6개년 계획 짜고..
그런데 5년 전부터 피정 센터 와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궂은 일들, 잡일들을 기쁘게 하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높은 곳에만 있었던 것에 대해, 하느님께 형제들께 송구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가장 힘든 일을 찾고, 공동체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은혜로운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인생의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청소노동자들의 고충도 알게 되고 주방 노동자들의 노고와
그런 일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성탄 준비하고 있습니다. 탄생하실 주님을 더 깊이 뚜렷이 뵙고 싶다면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휘황찬란한 밝은 곳이 아니라 심연의 어두운 아래로 내려서야 합니다.
구세주의 찬란한 별빛을 뵙고자 한다면,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번화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어두운 밤길을 지속적으로 걸어야 합니다.
깊어가는 대림 시기 흥청망청 술잔치, 말잔치을 줄이고 좀 더 자제하고 좀 더 청빈한 삶을 추구하고,
그래서 생긴 여유분을 가난한 이웃과 적극적으로 나눌 때, 아래에 있는 이웃들을 기쁘게 찾아나설 때,
그 자리에 아기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대림 제3주일: 다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
대림 제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
(스바 3,15.17)
이처럼 그들이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삶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리피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가 일쑤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로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거부로 상처 입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14.토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1542-1591) 기념일
집회48,1-4.9-11 마태17,10-13
엘리야의 재림
“나는 누구의 재림일까?”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어 주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작금의 위기의 시대, 저절로 시편 화답송 후렴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참으로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또 배웁니다.
이 또한 전화위복이 기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견해가 극단적으로 갈리니 참 잘 분별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래서 현재를 알기위해 역사 공부는 필수입니다.
역사를 통해 오늘을 잘 드려다 보고 분별하여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만세칠창중,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는 절박하고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새벽 언뜻 눈에 들어온 성구가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다”
(God is light, and in Him, there is no darkness)
괄호 안에 영어로 써놓고 다시 확인해 봅니다.
참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 하느님의 빛입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진리의 연인’이 되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와 더불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현자의 지혜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반듯해지고, 군주는 간諫하는 말을 들으면 거룩해진다.”<서경>
“막막한 바다와 같은 삶을 헤매지 않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자신만의 별자리를 마련하라.”<다산>
길잡이의 스승과 주변의 의견에 경청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의 좌표가 되는 자신만의 별자리 같은 영적스승을 영적도반을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별자리가 되는 분들은 교회내의 별같은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는 중세기 스페인의 아빌라의 대 데레사와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역시 제 별자리가 되는 분입니다.
1563년 21세 되던 해, 가르멜회에 입회해 1567년 사제가 된 후, 여성 가르멜회 개혁에 성공한
아빌라의 데레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맨발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개혁을 시도하나 거부되어,
1577년 가르멜회 수사들에 의해 톨레도의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9개월후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 뒤 1581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맨발 가르멜회가 공인되지만, 1591년 마르리드에서 개최된
수도회 총회에서 비판을 받아 은자가 되었고, 그해 우베다의 한 수도원에서 쓸쓸히 향년 49세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평생 고통과 수난의 삶이었지만 성인의 영적체험과 주옥같은 시편들은 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합니다.
십자고상의 예수님과 대화의 신비체험도 유명합니다.
“요한아, 너의 이 모든 수고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고 경멸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깊고 멋진 주님과 사랑의 만남인지요!
이런 영적 환시 체험이 연속된 고난을 이겨낸 힘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을 때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님, 당신만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을 제외한 어떤 것도 원치않습니다.”라는 고백도 연상됩니다.
두분 다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삶의 전부였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성인의 영성고전에 속하는 대표 작품으로는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가 있습니다.
1726년 교황 베네딕도 교황 13세에 의해 시성되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현재의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엘리야의 재림을 알아채는 예수님의 혜안이 놀랍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영광스러운 변모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대화를 나눈후 일어난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새삼 시공을 초월하여 빛이신 하느님 안에서 옛 성인들과 깊은 내적 통교를 나눴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를 스승으로 삼았던,
또 ‘진리의 협조자’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교황 베네딕도 16세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물음에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뿌리에 닿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뤘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망각의 병이 문제입니다.
망각의 무지로 인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이고 인류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알았고, 세례자 요한의 고난에서 자신의 고난을 예견하는 예수님입니다.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이라면 대림시기를 맞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재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가 누굽니까? 구약에서 에녹과 모세와 더불어 승천한 분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 오늘 제1독서가 잘 보여줍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통쾌한 집회서의 말씀 안에 얼마나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은 엘리야인지
그 진면목이 잘 드럽납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해진 때가 되자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의 재림이 되어,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어른들의 마음을 젊은 이들에게 되돌리며
공동체내의 안정과 평화를 구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후반부 말씀도 참 좋은 힘이 됩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만나는 참 좋은 성인들이고, 우리를 떠났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주님 안에서 잠든
행복한 분들이요, 우리도 반드시 살아나 만날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함께 우리 모두 재림한 세례자 요한이 되어
주님의 길을 마련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4.6). 아멘.
12/15(일) [(자) 대림 제2주일(자선주일)], 되새김 구절
1.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조재형 신부)
2.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인생의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청소노동자들의 고충도 알게 되고 주방 노동자들의 노고와
그런 일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성탄 준비하고 있습니다. 탄생하실 주님을 더 깊이 뚜렷이 뵙고 싶다면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휘황찬란한 밝은 곳이 아니라 심연의 어두운 아래로 내려서야 합니다.
구세주의 찬란한 별빛을 뵙고자 한다면,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번화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어두운 밤길을 지속적으로 걸어야 합니다.
깊어가는 대림 시기 흥청망청 술잔치, 말잔치을 줄이고 좀 더 자제하고 좀 더 청빈한 삶을 추구하고,
그래서 생긴 여유분을 가난한 이웃과 적극적으로 나눌 때, 아래에 있는 이웃들을 기쁘게 찾아나설 때,
그 자리에 아기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엘리야가 누굽니까? 구약에서 에녹과 모세와 더불어 승천한 분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 오늘 제1독서가 잘 보여줍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통쾌한 집회서의 말씀 안에 얼마나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은 엘리야인지
그 진면목이 잘 드럽납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해진 때가 되자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의 재림이 되어,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어른들의 마음을 젊은 이들에게 되돌리며
공동체내의 안정과 평화를 구축하라는 말씀입니다.(이수철 신부)
12/15(일) [(자) 대림 제2주일(자선주일)], 제 176-46일 기도
복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쫓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15일(일) 10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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