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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2월 16일 월요일[(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2월 16일 월요일[(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예레 31,10; 이사 35,4 참조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땅끝까지 전하여라. 보라,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

본기도

주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어주시고
저희를 찾아오시는 성자의 은총으로
저희 마음의 어둠을 비추어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는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24,2-7.15-17
그 무렵 2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5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6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7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5(24),4-5ㄱㄴ.6과 7ㄴㄷ.8-9(◎ 4ㄴ)
◎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복음 환호송

시편 85(84),8
◎ 알렐루야.
○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에게 온갖 선물을 베풀어 주셨으니
그 가운데에서 저희가 모아 바치는 이 제물을 받아들이시고
현세에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후세에서 영원한 구원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06(105),4-5; 이사 38,3 참조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 제3주간 월요일

 

교회는 2025년을 희망의 희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2025년 사목 지침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번 희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희망의 순례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희년의 목적과 의미는 그저 전대사를 얻는 좋은 기회에 그치지 않고, ‘구원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뜨겁게 하는 해로 우리를 초대함에 있습니다. 이 뜻깊은 희년에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번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대로, 순례는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하는 여정임을 묵상케 합니다. 도보 순례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통해 우리네 삶에서 땀 흘리는 수고로움의 고귀한 의미도 되새기게 되고, 순례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향해 시노드 여정을 함께하는 길동무임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도 됩니다. 나아가, 도보 순례는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것 영원한 것을 묵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를 읽고 있습니다. 2025년의 화두 지킴과 바꿈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지킴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 경쟁력을 잘 보여준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은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이 시골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식당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본은 200,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 일본은 그런 장인 정신으로 제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번 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직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기업도 그런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그런 일본을 부러워했습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경제는 일본을 모방하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바꿈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지킴으로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한국은 과감하게 혁신과 개혁을 선택했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내 말고는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디지털의 생태계에서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블루오션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팩스와 도장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반면 한국은 전자결재와 인터넷으로 기업을 운영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음반 판매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는데 한국은 음원과 유튜브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BTS, 유진스와 같은 가수들이 세계 음악시장에서 성공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선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 관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유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개혁과 혁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들에게 권위의 근거는 전통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과 율법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율법과 전통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형제와 자매의 도 과감하게 바꾸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 같은 인생을,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잎 같은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벌의 도구였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의 표징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소명을 뜻합니다.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찰하고 새로워지는 공동체로 남아야 함을 상기시키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이는 교회의 살아 있는 신앙과 시대적 책임,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의 지속적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 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3주 월요일

복음마태 21,23-27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

 

존경하는 선배께서 오래전 겪은 참담한 체험입니다.

한 모임에 참석하셨는데,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실행하는 모임이었답니다.

거기에는 나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모임 시작 때 쭉 돌아가면서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일 관심을 끄는 질문은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이었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말로만 듣던 엄청난 대학,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오랜 세월 공부한 박사님들이었습니다.

우리 신부님 차례가 되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신학 공부 외에 다른 학력은 없습니다.”

 

그랬더니, 회의 중간에 담당자께서 조용히 신부님에게 다가오시더니, 귓속말로 그러더랍니다.

“다음 모임에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학력, 경력, 자격증, 스펙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가방끈 긴 사람들 중 으뜸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이었습니다.

유다교를 대표하는 중요인사들이자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백성의 원로들은 정통 율법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유다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은 정식 율법학교 졸업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문하생도 아니었습니다.

교수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자격자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허락이나 승인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따져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있어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권한이었습니다.

합당한 절차와 자격, 제도와 법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사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야매’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며 예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이십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분이십니다.

스승 중의 스승, 참스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 모든 피조물 전체, 인류 전체에 대한 권한을 당신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한없이 부족하고 철딱서니 없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자격유무에 대해서

따져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한 분야를 완전히 터득한 대석학, 박사학위 심사를 심사하는

석좌교수에게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할 텐데 그들의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려면 질문 자체가 진실된 질문이어여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질문,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하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삐뚤어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성령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자격과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세상 모든 인간의 권한 위에 서 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대림 제3주간 월요일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 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가려진 제 위선의 무게임을 재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15.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스바3,14-18ㄱ 필리4,4-7 루카3,10-18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뻐하여라, 기도하여라, 회개하여라”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이후 기상하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하루도 빠짐없이 바쳐온,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만세칠창 입니다.

참으로 기도가 절실한 어지럽고 혼란한 두려운 세상이요, 국내상황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아마도 제가 세상 마치는 날까지 계속될 ‘만세칠창’에 ‘매일강론쓰기’입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국민은 위대합니다. 

어제 새롭게 입증되었습니다.

 "정말...대단한 대한민국!” 소임을 마친 우국회의장의 한마디 소감이였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나 나라를 살리고 구원한 것은 언제나 평범하나 깨어 있는

민초(民草)들의 국민이었습니다.

더불어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독보적 존재, 보석같은 대한민국인지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어제는 탄핵이 의결됨으로 위기는 일단락 됐고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경탄(敬歎, 驚歎)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모든 일이 민의(民意)에 따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200백만 환호! 막힌 속 뻥 뚫려!”

“국민의 승리! 탄핵 가결에 200백만 기쁨의 함성!”

 

인터넷 머릿기사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가톨릭교회의 양대 신문도 지난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교회지도자들의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내용이

일면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 피와 땀으로 이룩한 민주주의 지켜낼 것”

“국민 요청에 즉각 응답하는 책임과 처벌 촉구”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입당송 라틴어 첫 말마디에 따라 ‘가우데테(Gaudete;기뻐하여라)’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에 걸맞게 빛나는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색 장미제의를 입는 주일이기에 장미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어제의 탄핵의 역사적 사건에 이어 오늘 기쁨의 장미주일을 맞이하니 하느님의 오묘한 구원섭리를

깨닫게 되어 더욱 감사와 찬미의 마음 가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열화와 같은 설교를 듣고 감동한 군중은 그에게 묻습니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고, 답은 “기뻐하라, 기도하라, 회개하라” 셋으로 요약됩니다.

세개의 영롱한 대림촛불이 이를 상징합니다. 

 

첫째, “기뻐하여라”입니다.

그래서 ‘기뻐하여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여라’입니다.

슬픈 성인은 모순이요 너무 안 어울립니다.

우울과 슬픔, 심각함은 결코 영성의 표지가 아닙니다.

정말 믿는 이들의 특징은 기쁨과 유우머 감사요, 성인들은 고통과 시련중에도 내적평화를 누리며

기쁨의 꽃처럼 살았습니다. 

 

어제 여의도에 운집한, 200만의 시민들의 모습도 평화롭고 즐겁고 질서정연하기가 흡사 꽃처럼,

꽃의 바다처럼, 꽃별 가득한 하늘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9월부터 저를 행복하게 했던 짧은 자작시도 생각났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를 찾아 오시는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기에 이런 저절로 샘솟는 기쁨,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오늘 스바니야 예언자도 우리에게 기쁨을 촉구합니다.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내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축제의 날인 양,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우리 각자는 물론, 교회에 더 나아가 작금의 큰 트라우마를 겪은 대한민국에 주는 위로와

격려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 모두 분발하여 기쁘게 살 것을 촉구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 마중나가는 기쁨, 바로 대림의 기쁨입니다.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기에 샘솟는 기쁨입니다. 

 

둘째, “기도하여라”입니다.

기쁨이 저절로 기도하게 합니다.

기쁨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기뻐할 때 찬미와 감사요, 찬미와 감사를 바칠 때 샘솟는 기쁨에 순수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이요,

저절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심신의 힐링에 희망과 기쁨, 평화의 샘인 찬미와 감사의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옥같은 말씀이 또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셋째, “회개하여라”입니다.

참된 회개는 회개의 열매인 회개의 실천으로, 즉 정의의 실천, 사랑의 실천, 자선의 실천으로 입증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 말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는 가장 높은 자선이다” 말했습니다.

정말 좋은 정치, 정의와 평화의 정치라면 이보다 더 좋은 자선도 없을 것입니다. 

 

날로 가난해지는 보편적 가난의 국민들입니다.

이제는 나라가 큰 가정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도래했습니다.

국민을 섬기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민생을 챙기는 것이 최고의 자선이자 정의임을 위정자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체적 회개의 실천을 말합니다.

다음 모두가 자선이자 동시에 정의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지 사람은 못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구체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나눔이 자선이자 정의입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정직이 자선이자 정의입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군사들에게 준 회개의 실천 처방입니다. 분수에 만족하고 분수를 넘지 말라는 것이니

이 또한 자선이자 정의입니다.

 

조규만 주교는 이웃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도 자선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쁨의 삶이, 기도의 삶이, 회개의 삶이 주님을 닮아 날로 우리 존재자체가

주님의 자비와 지혜, 정의와 희망,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되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자선이자 정의와 평화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아멘.


12/16(월) [(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신학교에서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소명을 뜻합니다.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찰하고 새로워지는 공동체로 남아야 함을 상기시키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조재형 신부)

 

2.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가려진 제 위선의 무게임을 재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12/16(월) [(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제 177-47일 기도

 

복음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타인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가려진 제 위선의 무게임을 재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을 올려놓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16일(월) 5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