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13일 목요일[(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어서 와 하느님께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네.
본기도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라. 그 말씀에는 너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빵과 포도주를 마련하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주셨으니
이 예물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또는>
마태 5,4.6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기꺼이 인류 구원에 앞장서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5주간 목요일
헌법재판소에서 비상계엄이 관련된 심문이 있었습니다.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은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총을 쏴서라도 문을 열고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는 경찰청장, 특전사 사령관, 방첩사 사령관의 일치된 증언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지시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은 포고령의 내용도 몰랐다고 합니다. 단순히 겁주기 위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결의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권한 대행 체제로 정부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있었고,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도 있습니다. 법원에 난입해서 집기를 부수고, 경찰을 폭행하고, 판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정과 정의, 법과 원칙을 떠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움은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서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는 ‘숨’을 넣어 주셨고 그 숨은 인간의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옳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즉 불의를 거부하는 양심을 뜻합니다. 이는 유교에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간주하지만, 사실 성경과 신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수치심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이 수치심은 단순히 부끄러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여는 초대장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시며, 죄 안에서도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그의 회개는 수오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다시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수오지심은 죄를 깨닫고 회개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예수님의 시선을 마주하고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수오지심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는 그가 진정한 제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수오지심을 잃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6장 15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혐오스러운 짓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죄를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수오지심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 사회적 불의, 그리고 인간의 탐욕은 모두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회개하고 창조 세계를 돌보아야 한다고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잃지 않고 수오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수오지심은 단순한 도덕적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수오지심은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구체화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수치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찬례에서도 우리는 수오지심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겸손한 수오지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용서와 회복을 청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희망으로 바꿔 주십니다. 수오지심은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양심 성찰을 통해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잘못된 구조를 부끄러워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데 앞장서면 좋겠습니다.
수오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성화로 나아가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아, 우리의 수오지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 7,24-30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 5주간 목요일
<자비에 대한 믿음>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지방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그곳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들을 배줄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지독한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청이 단순히 거절당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배신감마저 들면,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 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로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 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12.연중 제5주간 수요일 창세2,4ㄱ-9.15-17 마르7,14-23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를 아는 지혜와 겸손, 한계의 훈련과 자유>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요한17,17)
연중 제5주간 제1독서는 창세기입니다.
오늘은 앞서의 천지창조와 또 다른 하나의 창조일화를 만납니다.
앞서의 사제계 문서보다 훨씬 오래된 야훼문서에 나오는 설화입니다.
오늘은 천지창조와 별개로 인간의 창조에 초점을 맞춥니다.
창조설화는 역사도 아니고 과학도 아닙니다.
오늘 창조설화의 의미는 이땅의 사물의 순서에서 인간이 우선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흙으로 인간의 몸을 빚어내는 도공처럼 일하는 모습입니다.
히브리어 아다마(땅)에서 유래한 아담(사람)입니다.
이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어제처럼 긴 창조과정 끝에 모든 하위 피조물이 생겨난 다음 나타나지 않고,
다른 모든 것보다 먼저 처음에 생겨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에덴 동산을 만들고 그 동산에는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에
과일을 제공하게 하셨고,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두셨습니다.
수메르언어 에덴에서 유래한 에덴은 비옥한 평야를, 히브리말에서는 ‘기쁨, 환희’를 의미하므로,
에덴은 기쁨의 정원을 뜻하며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어 ‘파라다이스(낙원)’라는 단어를 얻습니다.
남자인 사람의 책임은 정원을 경작하고 돌보는 것이며 그는 모든 식물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전체적인 인상은 삶이 쉽고 매우 즐거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오늘 창세기 독서는 여기서 끝납니다. 모두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며 분명히 한계가 주어집니다.
절대로 선악과 나무 열매는 건드리지 말라는 한계입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는 죄를 짓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마치 그리스신화의 판도라 상자가 열릴 때 처럼 시작되는,
인간 불행이요 죽음입니다.
여기서 생각난, 오래전에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결코 영원히 잊지 못할 충격적 말마디였습니다.
독일의 문호이자 시성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한계를 마구 유린하며 탐욕에 따라 함부로 막 살 때 바로 거기가 지옥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무수히 목격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창조시 하신 일도 혼돈의 땅을 순차적으로 한계 짓는 일입니다.
서로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도 각자 영역의 한계를 지키는 것은 기본적 필수 의무입니다.
수도원의 자연을 봐도 경계의 한계에 따라 각 구역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루 수도원의 일과표도 각 영역이 한계되어 있으며 전체가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탐욕으로 한계를 넘어섬으로 균형과 조화가 깨지고 무질서하고 혼란할 때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모든 분쟁과 싸움은 한계를 넘을 때 시작됩니다.
바로 이런 한계를 깨는 것이 범죄요 이들은 감방의 좁은 공간의 한계내에서 지내는 벌을 받게 됩니다.
모든 분쟁과 싸움은 한계를 넘을 때 시작됩니다.
참으로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이요, 서로의 한계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지켜주는 것이
예의이자 사랑입니다.
그러니 한계의 훈련, 한계의 영성입니다.
한계의 훈련과 자유입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은 물론 모든 수행이 결국은 한계의 훈련을 통해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한계의 영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이 참으로 단호합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은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 재차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들은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실 먹고 아래로 나가는 오물의 배설물은 화장실의 정화조를 통해 완벽하게 처리되는데,
문제는 위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입으로부터 나와서 사람을 더럽히고 공동체를 오염시키는 것들은 모두가 한계를 무참히 유린하는
죄의 악행들이고 이는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실존적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이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 모두 하나의 공통점은 한계와 질서를 깨는, 무질서의 혼란을 조성하는 악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악마가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런 한계를 유린하는 부정적 악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악마요,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만연된 현실이
바로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바로 우리 마음에서 시작됨을 봅니다.
천사, 괴물, 악마, 야수, 폐인 모두가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감사도 나오고 같은 입에서 온갖 악의 오물들을 쏟아냅니다.
결국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좋아야 말도 글도 행동도 좋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느님을 뵙는 행복도 있습니다.
시편 37장 말씀처럼 의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며,
그의 혀는 옳은 것을 말하느니라.
하느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있어,
그의 걸음이 흔들리지 않느니라.”(시편37,30-31)
마음의 도야(陶冶)를 위한 독서의 수행을 강조하는 다산의 말씀도 좋습니다.
“위로는 성현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을 깊이 깨우칠 수 있으니,
독서야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이다.”<다산의 여유당 전서>
기도와 함께 가는 독서요 공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한계의 수행과 훈련의 노력으로 마음을 정화하고 성화함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화답송 후렴처럼, 우리 가톨릭교회 수도자들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수행이 마음의 순화와 정화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또 한계의 영성, 한계의 훈련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감사로이 깨닫습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자기는 물론 서로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와 겸손이요 이런 한계를 배려하고 존중함이 예의와 사랑입니다.
한계의 훈련과 자유요, 이런 한계의 영성에 충실할 때 펼쳐지는 균형과 조화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호공존의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2/13(목) [(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수오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성화로 나아가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아, 우리의 수오지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시다. (조재형 신부)
2.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자기는 물론 서로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와 겸손이요 이런 한계를 배려하고 존중함이 예의와 사랑입니다.
한계의 훈련과 자유요, 이런 한계의 영성에 충실할 때 펼쳐지는 균형과 조화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호공존의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이수철 신부)
2/13(목) [(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13일(목) 4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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