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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3월 27일 목요일[(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3월 27일 목요일[(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본기도

주님,
존엄하신 주님께 간절히 비오니
구원의 축제가 다가올수록
저희가 더욱 큰 열정으로 파스카 신비를 준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7,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에게 23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24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25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26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28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5(94),1-2.6-7ㄱㄴㄷ.7ㄹ-9(◎ 7ㄹ과 8ㄴ)
◎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 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

복음 환호송

요엘 2,12-13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사를 기꺼이 받으시어
저희가 온갖 죄악에 물들지 않고 헛된 욕망을 멀리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상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19(118),4-5 참조
주님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를 모시고 힘을 얻은 저희를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이 신비를 올바른 삶으로 드러내며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인자하신 주님을 믿고 자비를 청하오니
주님께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이 백성이
주님 은총으로 좋은 것을 바라고
바라는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예수님과 베엘제불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인터넷은 검색을 통해서 정보를 찾게 됩니다. 인공지능이 내재 된 검색엔진은 비슷한 것을 검색할 수 있도록 보여줍니다. 뉴스를 검색하면 뉴스가 화면에 먼저 나옵니다. 음악을 검색하면 음악이 화면에 먼저 나옵니다. 인문학을 검색하면 인문학에 관련된 내용이 화면에 먼저 나옵니다. 우연히 다용도 가구를 검색했더니, 다용도 가구를 소개하는 화면이 먼나 나왔습니다. 의자인데 사다리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도 있었고, 소파인데 침대가 될 수 있는 가구도 있었습니다. 탁자인데 서랍장이 되는 가구도 있었습니다. 하나의 모습인데,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더 멋진 변신이 있습니다. ‘트랜스포머라는 영화는 로봇이 자동차로 변하기도 합니다. 변신이라는 면에서 잘 알려진 동물도 있습니다. ‘카멜레온입니다. 카멜레온은 몸의 색을 보호색으로 바꿀 수 있어서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성은 청순하게도, 화려하게도, 지적으로도, 활동적으로도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서 우리는 변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매미는 7년 동안 애벌레로 있다가 매가가 된다고 합니다. 여름에 듣는 매미의 노래는 7년을 기다려온 기쁨의 노래일 겁니다. 변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나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땅을 기어다니는 애벌레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예쁜 나비가 됩니다. 변신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저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더 높은 곳을 향한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더 낮은 곳을 향한 변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더 멋진 모습과 더 큰 능력을 지닌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의 변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본능에 의한, 자연의 법칙에 의한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에 의한 변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변신은 예수님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은총과 자비의 변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과 예수님의 모습은 화려하고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박해와 멸시를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신앙인의 변신은 겉모습의 변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의 변신은 타인에게 보여주려는 변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의 변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변신이어야 합니다. 그 변신 때문에 박해를 받을지라도, 그 변신 때문에 모욕을 당할지라도, 그 변신 때문에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변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야는 아무것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헤로데는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습니다.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짓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루카 11,14-23

 

신앙에 무관심한 자와 미지근한 자 중 누가 더 나쁠까?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보고는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마치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힘센 자와 강도가 싸우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하시며,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만약 전쟁에서 상급자가 하는 일에 자꾸 불만을 품거나 상급자를 인정하지 않는듯한 태도를

보이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마치 ‘탈영’을 하는 일과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고자 탈영하면 어떤 면에서 크게 피해를 주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을 수 있으나,

실제로는 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쟁에서 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게 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의 길 안내자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간절하게 말합니다.

“룸이 착한 주인님을 잘 모시겠어요. 골룸이 길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을 속이기 위해

친절한 모습과 간교한 모습을 반복하며 내부에서 그들을 분열시키고 약화했습니다.

그는 샘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했고, 프로도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려 결국 프로도는 샘마저도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프로도는 신뢰했던 친구 샘에게 “돌아가 버려! 네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

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골룸의 최악의 배신은 프로도와 샘을 거대한 거미 괴물 ‘쉴롭’의 소굴로 유인한 사건입니다.

그는 프로도를 죽게 하고 자신이 반지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결국 프로도가 거미에게

마비되고 위험에 처하게 만듭니다. 샘이 프로도를 구해냈지만, 내부에서 일어난 이 배신 때문에

프로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에 의해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가 아니어도 십자가의 길로 가시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냉랭한 사람보다 사랑하는 척하며 그분 곁에서 열성적이지 못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부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이끌며 로마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에서는 로마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며 로마를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한니발 앞에서 로마는 마치 늑대 앞의 양 떼와 같았다.”라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한 한니발의 모든 계획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졌습니다.

카르타고의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한니발의 성공을 질투하고 견제하며, 필요한 지원과 병력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은 계속해서 본국에 편지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지도자들은 이 요청을 무시하거나 지연시켰습니다.

 

결정적으로, 내부의 배신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 직전에 절정을 이룹니다.

카르타고의 정치 지도자들은 내부에서 협력하여 한니발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심지어 로마와

비밀리에 협상을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납니다.

 

전투 후, 절망한 한니발은 “내 진정한 적은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의 정치가들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법치주의 국가였기에 결단력이 빨랐으나, 카르타고는 결정을 지연하고

일치하지 않으며 패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마치 아버지처럼 자상하다가도 탈영한 자에 대해서는

매우 무서운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 자신이 탈영한 자의 목을 사정없이 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족이 있고 나이 든 부모가 있다고 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온 국민에게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냥 죄를 지어 자기만 지옥에 가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대통령 부부가 아무리 미워도 비행기 사고로 떨어져 죽으라고 하는 사제는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모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를 자신이 빠져도 되는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큰 노력을 하지 않고 주일미사에만 열심히 나옵니다. 그러나 선교도 전쟁입니다.

싸워서 쟁취하지 않으면 빼앗깁니다. 한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전쟁에서 한 민간인이 죽는 것보다

무서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신앙인이 선교에 열정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도 노력하지 않고

나만 혼자 신앙생활 하려고 한다면 역시 전체적인 사기를 떨어뜨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거운 것은 삼키시지만, 미지근한 것은 참아내지 못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김찬선 신부 강론

 

사순 제 3주간 목요일 - 모든 경우에 하느님을 선택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한 편에 섬으로써 많은 사람이 공동체를 깨는 잘못들을 범하니 똑바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며 양비론 곧 양쪽 다 문제가 있다는 식의 비판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이나 진영에 매이지 않겠다는 것이라면 올바른 자세일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닌 진리의 문제라면

분명히 어느 한쪽에 서야 하고 이때 양비론은 좋은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양비론의 많은 경우 진리의 자세가 아니라 이쪽저쪽 다 글러 먹었어식의 교만,

곧 나만 옳다는 식의 교만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야당 지도자가 잘못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를 극성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도

계엄을 일으키고 지금 탄핵받는 대통령과 똑같이 나쁘다고 하고,

그를 지지하며 법원까지 부스는 자들과 똑같이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정치적인 사안이 아니더라도

더 큰 악과 더 큰 잘못이 있으면 그것이 더 큰 잘못과 악이라고 한 뒤

이것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라고 해야지 잘못이 똑같다는 양비론은 안 됩니다.

 

더욱이 악령의 괴수 베엘제불과 하느님 사이에서 양비론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악의 세력과 악의 세력화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나도 악하고 나도 죄인인데하는 자기반성은 겸손의 차원에서 옳은 태도이지만

나의 죄악에 대한 반성 때문에

악의 세력과 세력화에 단호한 태도를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하느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하기도 하고,

최악 대신에 차악을 차선책으로 선택하기도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 편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받으실 때 주님께서 취하신 태도입니다.

 

배고픈 주님을 빵으로 악마가 유혹할 때 주님께서는 네가 주는 빵은

먹지 않겠다는 식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말씀으로 살겠다는 최선의 선택을 하셨고

이어지는 악마의 유혹들에 대해서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모든 경우에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 편에 섭니다.

 

유혹당할 때 당하지 말고 하느님을 선택하고,

고통당할 때 당하지 말고 하느님을 선택하고,

두려움과 마주할 때 하느님을 선택하고,

악의 세력들과 마주할 때 더욱더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 편에 섭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26.사순 제3주간 수요일                                                              신명4,1.5-9 마태5,17-19

 

                                                         법과 규칙, 상식의 준수

                                                               영성의 기초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오늘 복음과 독서의 주제가 일치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이고, 독서는 '하느님의 법'입니다.

공동체 삶의 기초가 법과 규칙입니다.

공동체의 그누구도 법이나 규칙위에 있지 못합니다.

누구나 법앞에 평등은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법이나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제가 1992년부터 지금까지 33년동안 금요강론을 멈춘적이 없는데 다룬 내용은 <베네딕도 수도규칙>이었고

저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그날까지 반복하여 이 규칙을 공부할 계획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자명하게 실천되어야 할 법이 유린됨을 목격합니다.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두려워할줄도 모르고 너무 뻔뻔하게 공공연히 법을 위반하면서 법위에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 국민들의 신뢰를 잃으면 나라도 망합니다. 

그래서 법을 가장한 도적 무리란 뜻의 ‘법비(法匪)’라는 말도,  온갖 법 지식을 이용해 성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추(法鰍;법꾸라지)’란 말도 회자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인간 누구나 공감하는 불문율입니다.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법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법없이는 못삽니다.

법이 있어야 생존경쟁치열한 약육강식의 시대에 약자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규칙이 준수되지 않으면, 특히 지도자들이 법을,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서서히

내적으로 무너집니다. 

 

필연적으로 이런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 공동체는 내적분열을 겪고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법이 잘 지켜져야 공동체의 성원들도 공동체를 사랑하며 효능감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법과 규칙의 준수는 함께 하는 공동체의 성원들도 그대로 보고 배우기에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옛 수도원을 창립했던 분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분들이요 삶자체가 살아있는, 걸어다니는 복음서라 할 정도로

보고 배울 법이나 규칙 자체였기에 규칙이 없어도 평화공존의 융성한 공동체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살아 생전에 우선 마련한 것이 법규와 규칙이었습니다.

카리스마와 관계없이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우선적인 것이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동의하고 합의한

법규나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삼학(三學)도 계정혜(戒定慧)의 순서입니다.

계울준수의 바탕위에 안정(安定)이 있고 관상의 지혜가 뒤따릅니다.

영성신학도 예전에는 수덕신비신학이었으니 수덕의 준수위에 바탕한 신비신학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법규나 규칙의 준수가 없는 공동체라면 사상누각, 모래위에 공동체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예전 장상의 언급도 있지 못합니다.

상식과 양식에 기초하지 않은 영성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말하기전에 우선 기본이 되는 상식부터 규칙부터 지키라는 것입니다.

 

제가 맨처음 베네딕도 수도자는 ‘평화의 전사’라는 말마디를 배운 것은 황춘흥 다미아노 선배수도사제였고

이분이 당신을 찾는 수녀들과 주고 받았다는 문답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분이 없었다면 제가 수도원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제 수도성소에 주님의 가교역할을 했던 결정적인 분으로 타계하신지 이미 오래지만 지금도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는 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물음에 신부님을 일언지하에 답변하신 내용은 단 하나였습니다.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이치럼 잘 사는 것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요 단순합니다.

규칙대로 살면 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규칙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자발적 정신으로 규칙대로 살아야 공동체의 기강도 서고

견고한 공동체도 건설됩니다.

 

대통령이나 입법, 사법, 행정부 지도자들 역시 나라 공동체 질서의 기초와 기본이 되는 법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제1독서의 모세야 말로 살아있는 법과 같은 분임을 봅니다.

모세가 우선적으로 강조한 것도 규정과 법규의 준수였습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할 것이다.”

 

이런 종교가 명품종교요 이런 신자가 지혜롭과 슬기로운 명품신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단호하기가 추상같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존중의 표현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법이 오늘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입니다.

율법주의자가 아닌 율법정신의 사랑으로 살았던 ‘살아 있는, 걸어 다니는 복음서’와 같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빛날 사랑의 율법이요,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모세처럼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법 준수에 철두철미한 율법정신의 사랑이 체화(體化)된 분입니다.

모세와 예수님, 이분들의 율법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요, 절대로 율법주의자가

될 수 없는 분들입니다. 

 

작금의 문제는 좌우의 문제라기 보다는 상식과 비상식, 준법과 위법의 문제입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한 비상식이, 위법이 일상화되고 만연되어가는 비정상적인 사회가 문제입니다.

 

사순시기 비상한 회개가 아닌 삶의 제자리로 돌아와 상식과 준법의 정상적 삶을 사는 회개가 긴요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상식과 준법의 삶을, 예수님처럼 ‘살아 있는 걸어 다니는

사랑의 복음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여,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어,

 그 진리 안에서 걷게 하소서."(시편86,11ㄱ). 아멘.


3/27(목)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조재형 신부)

 

2. 카르타고의 정치 지도자들은 내부에서 협력하여 한니발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심지어 로마와

비밀리에 협상을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납니다.

 

전투 후, 절망한 한니발은 “내 진정한 적은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의 정치가들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전삼용 신부)

 

3. 진리의 문제라면 어느 한쪽에 서야 하고 이때 양비론은 좋은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악령의 괴수 베엘제불과 하느님 사이에서 양비론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악의 세력과 악의 세력화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유혹당할 때 당하지 말고 하느님을 선택하고,

고통당할 때 당하지 말고 하느님을 선택하고,

두려움과 마주할 때 하느님을 선택하고,

악의 세력들과 마주할 때 더욱더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 편에 섭니다.(김찬선 신부)

 

4. 불교의 삼학(三學)도 계정혜(戒定慧)의 순서입니다.

계울준수의 바탕위에 안정(安定)이 있고 관상의 지혜가 뒤따릅니다.

영성신학도 예전에는 수덕신비신학이었으니 수덕의 준수위에 바탕한 신비신학임을 말해 줍니다.

 

이런 법규나 규칙의 준수가 없는 공동체라면 사상누각, 모래위에 공동체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예전 장상의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상식과 양식에 기초하지 않은 영성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말하기전에 우선 기본이 되는 상식부터 규칙부터 지키라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0


 

3/27(목)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진리의 문제라면 어느 한쪽에 서야 하고 이때 양비론은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더욱이 악령의 괴수 베엘제불과 하느님 사이에서 양비론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악의 세력과 악의 세력화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유혹당할 때 당하지 말고 하느님을 선택하고,

고통당할 때 당하지 말고 하느님을 선택하고,

두려움과 마주할 때 하느님을 선택하고,

악의 세력들과 마주할 때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 편에 서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7일(목) 5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