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3월 28일 금요일[(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신들 가운데 당신 같은 이 없나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본기도
주님의 은총을 저희에게 인자로이 내려 주시어
언제나 저희가 지나친 욕망을 끊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 전에는 모르던 말씀을 나는 들었네.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풀어 주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내려 주었다. 곤경 속에서 부르짖자 나는 너를 구하였다.” ◎
○ 천둥 치는 구름 속에서 너에게 대답하였으며, 므리바의 샘에서 너를 시험하였다. 들어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타이른다. 이스라엘아, 부디 내 말을 들어라. ◎
○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
○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
복음 환호송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감사드리며 바치는 이 예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에게 언제나 구원의 제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희생 제물보다 낫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권능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오늘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가 충만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이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언제나 주님의 자애에 의지하며
어디서나 주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달라스로 오기 전에 저는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일했습니다. 며칠 전에 책을 읽으면서 신문과 민주주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문의 기능과 복음서의 기능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늘은 신문과 방송이 민주주의에 이바지한 점을 생각해 보고, 이것이 복음서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과정과 어떻게 닮았는지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특별히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진리를 전하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은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닙니다. 진실을 알리는 도구이자,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유명한 사진이 있습니다. 한 베트남 소녀가 옷이 타버린 채 울면서 도망치는 장면입니다. ‘네이팜탄 소녀’ 사진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사진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이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높아지면서, 전쟁이 종식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문과 방송이 진실을 전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부당한 전쟁도 멈출 수 있고, 억울한 사람도 구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알릴 힘"입니다.
신문과 방송은 정치와 사회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있습니다. 이 소설이 원래 신문에 연재되던 것이었습니다. 신문 연재 소설은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조금씩 연재되었고,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광수의 ‘무정’과 같은 작품이 신문에 연재되면서 한국 근대 문학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존했던 의적 장길산을 주인공으로 하여 민중의 저항과 해방을 다룬 역사 소설입니다. 최인호의 상도는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소설로, 상인의 도(道)와 성공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문 연재 소설이 복음서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복음서도 한 번에 세상에 퍼진 것이 아니라, 조금씩 기록되고, 전해지고, 읽히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문이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진리를 전하듯, 복음서도 세상에 조금씩 퍼져 나가며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통해 진리를 전한 대표적인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하고, 편지를 써서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바오로가 쓴 편지, 즉 로마서, 고린토서, 갈라디아서 같은 서신들은 지금도 우리가 신앙을 배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믿었고,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매를 맞고도, 배가 난파되어도 결코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오늘날 언론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정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협박을 받아도 진실을 보도하려는 기자들처럼, 바오로 사도도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진리를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정보가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가짜 뉴스, 조작된 정보, 편향된 보도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처럼, 민주주의를 지켜온 언론인들처럼,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복음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짜 뉴스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 사랑과 자비의 가르침을 전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랬듯, 우리도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12,28-34
하느님을 마음을 잡읍시다. 그분을 감동시킵시다!
제 어린 시절 집집마다 가축을 키워 내다팔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경험많은 어르신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닭을 잡을 때는 날개를 잡으면 끝이다. 토끼를 잡을 때는 귀를 잡으면 꼼짝 못한다.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으면 쉽다.”
그 대목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개는?
같이 사는 개들에게 실험을 해봤습니다.
꼬리를 꽉 잡았더니 엄청 으르렁댔습니다.
개는 잡지 말고 그냥 쓰다듬어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손목을? 머리를?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그 어떤 부위든 신체 접촉을 아예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다만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감동을 줘서 마음을 사로잡으면 다 잡는 것입니다.
그 어떤 교육적 노력도 먹히지 않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그 어떤 작은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은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 즉 감동을 통해 마음을 사로잡은 때였습니다.
때로 마음이란 것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담길때와 마음이 전혀 없을때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사랑,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마음과 정성, 진정성이 당긴 기도는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니 더 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형식적, 습관적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기도 생활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우리 신앙의 원천>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오늘 입당송에서도,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도, 복음에서도, 같은 내용의 말로 반복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올렸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마르 12,29)
이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시라는 그분의 존재 차원을 밝히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라는 존재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곧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그렇게 내 이웃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집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어쩌면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그가 인간의 행동규범으로서의 계명을 깨닫고 있을 뿐, 그 계명의 이유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먼저 사랑 받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곧 그는 ‘자신의 사랑’을 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15,12)는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의 시금석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 환호송에서 말하는 회개는 한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호세 14,2) 입니다(회개를 나타내는 ‘metanoia’의 구약성경의 단어인 ‘tesubah’의 원래 뜻).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본질적으로 단지 윤리적 행동의 뉘우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돌아옴, 곧 존재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사랑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께로 돌아와 찬양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27.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예레7,23-28 루카11,14-2
하느님의 나라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어느 현자의 두 한자성어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역시 하느님을 믿는 마음의 자세가 이러할 것입니다.
“묵이성립(黙而成立)”; 묵묵히 견디다 보면 언젠가 이뤄진다.
“불언이신(不言而信)”; 말이 없어도 믿는대로 된다.
너무 조급하지도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절로가 아닌 열린 마음에 간절하고 진실한 내외적 분투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참으로 개방적 자세를 말해 줍니다.
문제는 바로 자기에게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내가 초대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내 안으로 초대해야 한다. 마음을 얻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꺼내라.”<다산>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논어>
완고하게 굳어진 내중심에서 벗어나,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충고입니다.
정말 문제는 내안에 있고 인간공통의 문제는 바로 무지입니다.
참으로 고질적 마음의 병이 무지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도 무지의 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이런 무지의 대한 답은 부단한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미사전 참회기도는 늘 반갑고 고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무지의 치유에 날마다 미사중 이 참회보다 더 좋은 기도도 없습니다.
사순시기 아침성무일도시 나오는 유명한 초대송도 참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 화답송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무디어지고 굳어진 완고한 마음이 바로 무지의 병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도 우리의 무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무지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참으로 무지에서 벗어난 구체적 회개의 길을 뜻하는 두 동사가 “들어라”와 “걸어라”입니다.
날마다 매순간 깨어 부단히 듣고 주님을 따라 걸어야 함을 배웁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개탄하시는 말씀도 얼마나 치명적인 무지의 완고한 인간 현실인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 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나는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보냈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이런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는 참된 회개가 아니곤 답이 없습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또 악화되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무지, 무식, 무도한데다 사악하기까지 한 사람이라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업보요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바로 이런 무지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도 반복되며 오늘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광야여정중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 회개가 없어 자기를 잃을 때 괴물도, 악마도,
야수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았던 분의 한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도원에 “숨을 쉬러 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상적으로 살기가 힘든 세상살이인지 깨닫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극단으로 굳어져 광기적이며 배타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 역시 무지한 인간의 전형입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을 곡해하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곡을 찌릅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영리한 사탄이 내적분열로 망하고 무너지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이며,
예수님의 구마행위는 순전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활동과 구마활동과 더불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작금의 극단의 내적분열로 치닫는 현실을 보면 사탄보다 더 어리석은 무지의 인간들임을 깨닫습니다.
나라든 공동체든 개인이든 외적의 침입보다는 언제나 내적분열로 망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참으로 내외적 분열을 막고 악마의 유혹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가장 힘센 분 예수님을 모시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삶은 평생 영적전쟁이요 주님과 함께 주님으로 무장하여 ‘주님의 전사’로 살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 편에 설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 우리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자주 성찰할 바 예수님편쪽에 서있는 가입니다.
늘 예수님 편에서서 예수님 중심의 삶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주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회개의 삶,
통합의 삶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부단한 회개와 더불어 날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 때 무지의 치유에 영적승리의 삶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3/28(금)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바오로 사도가 그랬듯, 우리도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조재형 신부)
2.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삶은 평생 영적전쟁이요 주님과 함께 주님으로 무장하여 ‘주님의 전사’로 살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당신 편에 설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 우리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이수철 신부)
3/28(금)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내 몸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8일(금) 4시5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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