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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3월 29일 토요일[(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3월 29일 토요일[(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03(102),2-3 참조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신다.

본기도

주님,
해마다 사순 시기의 재계로 파스카 성사를 준비하게 하시니
저희가 그 신비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1(50),3-4.18-19.20-21ㄱ(◎ 호세 6,6 참조)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 당신의 자애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 그때에 당신이 의로운 희생 제사, 제물과 번제를 즐기시리이다.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성사에 참여하며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루카 18,13 참조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언제나 저희를 천상 은총으로 채워 주시어
굳건한 믿음으로 성실히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의 오른팔을 펼치시어
믿는 이들에게 하늘의 도움을 내려 주시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찾아
합당하게 청한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작년 재의 수요일에는 제가 주례를 했기에, 올해 재의 수요일은 부주임 신부님이 주례를 하도록 했습니다. 키가 큰 부주임 신부님은 이마에 재를 바르는 것도 큼직하게 발라 주었습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작게 재를 발라 주었습니다. 교우들의 이마에 새겨진 십자가 모양이 마치 악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몸에 새겨진 백신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숱한 전투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이 받았던 훈장처럼 보였습니다. 작년보다 많은 200여 명의 교우들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 백신을 맞은 것처럼 보여서 든든했습니다. 내년 재의 수요일에는 더 많은 교우가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백신을 이마에 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재가 외적인 백신이라면 신부님의 강론은 교우들의 마음에 새겨진 백신 같았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고난과 아픔의 시간일 수도 있지만, 사순시기는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첫사랑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랐을 때 하느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팠을 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순시기는 회개와 참회의 시간이면서,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저는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는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이지만, 기도의 또 다른 의미는 지금 외롭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과 그릇된 신앙생활을 비유로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헌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헌금은 정성 된 마음으로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도, 단식할 때도, 자선을 베풀 때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면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입니다. 한국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도 미국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에 비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성인들의 삶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너무 쉽게 좌절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거나, 순위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의 모습을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 희망을 보게 됩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고 하는 말들은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희망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선하고 착한 사람들은 거두어 주신다는 확신을 통해서 현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이겨내는 것이 참된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신앙과 같은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희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이 빠지면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면 살이 빠지고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생활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행동 없는 희망은 진정한 희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루카 18,9-14

 

겸손하고 진솔한 세리의 기도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수시로, 사사건건 강한 대립각을 세우시던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말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이 죄인들이나 이방인들, 불결한 사람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존재,

하느님으로부터 선별된 거룩한 존재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러한 바리사이들의 선민의식과 우월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신앙을 절대 그냥 못 넘기셨습니다.

눈에 띄는 즉시 그들의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은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 11-12)

 

교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쳐진, 기가 차지도 않은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입니다.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입니다. 바리사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의식보다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티끌 같은 자신을 축복하셨음을 까마득히 잊고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늘 여기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 은총을 통한 의화(義化)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느님은 필요 없으며 결핍과 한계와 모순투성이의 인간인 자신에게만 의존하므로

그 길의 끝은 결국 멸망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을 꽤뚫어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 하느님께서도 결코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감 없는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반항적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예언자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아주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 건넨 욥의 대화는 더 솔직합니다.

“저는 너무나 비참해서 주님께서 저를 만든 날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으로 세리의 기도를 소개하십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가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 올려야 할 화살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는 ‘보는 눈’에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타인을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고, 세리의 눈은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입니다. 
곧 바리사이에게는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세리에게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곧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눈이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은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의 눈은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꼿꼿이 서서 혼자말로 ...기도하였습니다.(루카 18,11)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루가 18,13).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곧 죄인임을 깨닫고서,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28.사순 제3주간 금요일                                                           호세14,2-10 마르12,28ㄱㄷ-34

 

                                                       가장 큰 사랑의 이중 계명 

                                                                "회개와 사랑"

 

불암산 배경의 요셉 수도원에 37년째 정주하면서 하루하루 날마다 수없이 눈들어 바라보는 불암산입니다.

작년 9월부터 지금도 여전히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 오는 불암산 앞에 설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산앞에서 서면' 이란 짧은 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8>

 

사랑하는 주님앞에 설 때 가슴 가득차는 행복감도 이럴 것입니다.

또 요즘 산같은 정주의 삶에 자족自足, 자위自慰하며 바치는 고백시입니다.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은 산이예요”<2025.2.12>

 

오늘 말씀 묵상중 문득 떠오른 성인들의 임종어입니다.

성녀 소화데레사와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는 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의 임종어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양손을 들고 기도하며 임종하던 베네딕도 성인의 임종어는 전해지지 않습니다만 성규57장9절에 근거한

다음 고백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받으소서”

 

이분들의 임종어는 그대로 평생 좌우명이었고 묘지가 있다면 묘비명으로 해도 좋겠다 싶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대개는 살아온 대로 살고, 살아온 대로 죽습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선종은 없습니다.

시종여일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음을 입증하는 임종어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임종어는 무엇이겠는지요?

미리 정해서 좌우명 삼아, 미리 묘비명 삼아 살아도 참 좋겠다 싶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보고 배웁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사랑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이야기는 사랑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회개를 통해 사랑의 주님께 돌아가 체험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 사랑을 체험하며 새로이 충전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회개와 사랑의 달인이자 대가인 성인들이요 제1독서 호세아 예언자가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라.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이어지는 회개의 구체적 고백입니다.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곧장 이어지는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사랑의 신비가이자 시인이요 예언자 호세아를 통한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회개한 또 하나의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감미로운 사랑의 고백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시인이 따로 있나요. 호세아처럼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사랑을 압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사랑의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입니다.

모두가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주어진 선물인생이자 명품인생입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문, 사랑의 문입니다. 

 

회개도 사랑도 행복도 자발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체험이 저절로 사랑의 응답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경천애인 사랑의 이중계명이요 황금률의 사랑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 말씀에 어느 율법학자는 전폭적으로 공감하며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다’ 화답합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여 정말 하느님의 사랑에 감복, 감동한 자라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황금률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방대한 신구약 성경도 경천애인敬天愛人 사랑의 이중계명과 황금률黃金律의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자연스런 응답입니다.

사랑해서 비로서 사람입니다.

사랑밖에는 답이, 길이 없습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 사랑의 학생인 우리들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수록 날로 정체성 또렷한 자존감 높은 행복한 삶,

내적 부유와 자유의 충만한 삶입니다.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사랑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아멘.


3/29(토) 사순 제3주간 토요일

 

1.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기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자비하신 주님 앞에 언제나 부당한 죄인인 우리가 눈만 뜨면 드려야 할 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틈만 나면 쏘아 올려야 할 화살기도가 세리의 기도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경천애인 사랑의 이중계명이요 황금률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방대한 신구약 성경도 경천애인敬天愛人 사랑의 이중계명과 황금률黃金律의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수철 신부)

 

3/29(토)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루카 18,13)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9일(토) 9시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