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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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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후견인 누구를 택할 것인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후견인 누구를 택할 것인가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2-28 21:24:47 기원전 1046년. 무왕이 은(상)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창업 스트레스’ 탓일까. 무왕은 불과 2년 뒤 사망하고 만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 성왕이 뒤를 잇는다. 천하는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구정의 무게를 묻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구정의 무게를 묻다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2-14 21:19:09 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의 일이다. 분음(汾陰·산시성 완잉셴)의 사당 옆 마당에서 정(鼎), 즉 청동솥 하나가 발굴됐다. 최초의 고고학 발굴이었던 셈이다. “국보급 유..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통일신라시대 ‘복불복 게임’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2-07 21:03:05 ‘벌주로 원샷 3잔’ ‘무반주 댄스 몸개그’ ‘신청곡 부르기’…. 문무왕대(674년)에 조성된 경주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 궁중연회장이었다. 1974년. 이 연못 바닥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신라와 당나라의 바둑전쟁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신라와 당나라의 바둑전쟁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1-30 21:06:05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그걸 하는 게 그래도 현명한 일이다(不有博혁者乎 爲之猶賢乎..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갑골민주주의는 어떨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갑골민주주의는 어떨까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1-23 20:52:29 2008년 6월. 한성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나왔다. 소의 견갑골로 점(占)을 친 흔적이 완연한 갑골(甲骨)이었다. 부여는 백제와 고구려의 조상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무인(巫人), 혹은 무당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무인(巫人), 혹은 무당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1-16 21:36:19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87)는 점(占)을 끔찍이 사랑했다. 어느 날 무제가 며느리를 들일 날짜를 잡고 역술인 7명을 불렀다. 한데 7인7색이었다. 오행가는 “좋다(可)”고 했고,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전국시대 ‘풍자개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전국시대 ‘풍자개그’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1-09 21:01:34 전국시대 초나라에 우맹(優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골계가(滑稽家), 지금으로 치면 개그맨이었다. 어느 날 재상 손숙오(孫叔敖)가 죽은 뒤 집안이 풍비박산됐다. 우맹이 나..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立立立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立立立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입력 : 2011-11-02 18:34:48 “망측스럽게….” 2000년 4월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 웅덩이에서 야릇한 유물이 출토됐다. ‘남근(男根)’목간이었다. 길이가 22.6㎝(두께 2.5㎝)나 됐다. 목간의 밑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