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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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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박명숙(1955~ )/나팔꽃 5장 나팔꽃 첫새벽이 다가와 찬물을 끼얹자 팽팽히 귀를 매둔 어둠의 솔기가 터졌다 보랏빛 벨벳으로만 안을 덧댄 어둠이었다 여름밤은 달아나고 어둠의 딸 태어나 넝쿨손 뽑아올리며 혈통을 증거한다 한 뼘씩 허공을 디디며 아침에게로 기어간다 ―박명숙(1955~ )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시..
새를 기다리며―전봉건(1928~1988)/박새 4장 새를 기다리며 화가 이중섭의 그림책에서 제주도의 먼바다나 통영의 비탈진 낮은 마을 그런 것이 보이는 그림 한 장 떼어서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낡은 테이프 잡음이 좀 나기는 하지만 바하의 관현악 모음곡 제2번 B단조 플루트가 나오는 그것 장난감 같은 카세트에 볼륨 너무 크지..
시험에 떨어지고―장유(張維·1587~1638)/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 2장 입력 : 2012.09.03 22:33 시험에 떨어지고 送張生希稷下第後歸海西婦家 (송장생희직하제후귀해서부가) 책 보따리 달랑 들고 부모 곁을 떠났건만 객지에서 고생 끝에 실의하여 돌아가네 과거에 급제 못한 오늘의 한 어찌 풀까 고향의 박 넝쿨은 이태 넘게 못 보았네 자넨 시름겹게 바다의 달만..
옛날사람-곽효환(1967~ )/호박꽃 3장 옛날 사람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 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
달맞이꽃―김용택(1948~ )/달맞이꽃 6장 달맞이꽃 언니, 안 갔지? 안 갔어. 언니, 아직 거기 있지? 응 언니, 지금도 달 떠 있어? 응 언니, 응 시방도 거기 있지? 안 갈게 걱정 마. 빨리 응가나 해 알았어. 우리 언니 달맞이꽃 ―김용택(1948~ )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동시(2012.9.1)이다. 이준관 아동문학가의 평이다. 이 동시는 시골에..
구름―김수복(1953~ )-물푸레나무 4장 구름 저 구름은, 그리운 물푸레나무 머리 위에 앉았다가도 다시 햇살이 되어 해바라기 눈속에 들어가 해바라기가 되었다가 다시 해일이 되어 먼 섬 하나 들어올렸다가도 그리운 사람 마음속 무지개 되었다가, 굽이치다가, 서러운 강물 위에 누웠다가, 퍼지게 누웠다가, 몸속과 몸밖을 드..
미타원에 와서―백이운(1955~ )/국립현충원 현충문사진 3장 미타원에 와서 하얀 등 너울거리며 길을 열어 놓았다 수묵화 번져가듯 스러져간 생애들이 그렇게 갖고 싶었던 고요의 집 한 채. 혼자 죽은 어느 이름도 가볍지가 않구나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꿈결처럼 되뇌며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써내려간 정자체. 비로소 떠오른다 그 눈물빛 사랑의 힘..
님-―김지하(1941~ )/분당 중앙공원 사진 7장 입력 : 2012.08.23 23:04 님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저녁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손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