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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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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덕규(1961~ )/나리 사진 6장 꽃 한 해 동안 캄캄한 흙 속을 뒤져 찾아낸 걸 한순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해마다 똑같은 패를 쥐고 나와 일 년치 노역을 아낌없이 걸고 던지는 화투(花鬪), 향기로운 꽃놀이 끝에 집에 가는 차비나 해라 국밥이나 먹어라 개평을 뚝 떼어주는 이 아름다운 도박판의 결정(結晶) 까맣게 굳어..
익는다―이상교(1949~ )/분당 시범단지 5장 익는다 처음 가는 낯선 길 멀기도 하다. 두 번 세 번 가는 동안 길가 쌀가게, 키 큰 가로수 눈에 익는다. 약국 간판, 모퉁이 구두 가게 눈에 다 익는다. 눈에 익어, 발에 익어 가까워진 길. 처음에는 낯설던 얼굴도 눈에 익고 귀에 익어 가까워진다. 점점 가까워진다. ―이상교(1949~ ) 조선일..
지게―김영승(1959~ )/중앙선 정거장 8장 지게 할머니들은 여기가 어디에요? 잘 묻는다 그 불안한 표정은 어머니다 여기가 어딘가? 가 아닌 弱者의 모습 전철에서 할머니들은 륙색을 하나씩 메고 驛谷에서 松內 전철은 幻燈機처럼 스친다 창밖 丹楓은 쏟아져 할머니들은 ―김영승(1959~ )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시(2012.8.2)이다. ..
천일염―윤금초(1943~ )/강릉 안목해변 파도 4장 천일염 가 이를까, 이를까 몰라 살도 뼈도 다 삭은 후엔 우리 손깍지 끼었던 그 바닷가 물안개 저리 피어오르는데, 어느 날 절명시 쓰듯 천일염이 될까 몰라. ―윤금초(1943~ )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시조(2012년8월1일)이다. 정수자 시조시인의 평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가마솥 속이다. 햇..
지붕 위의 살림―이기인(1967~ )/민속촌사진 7장 지붕 위의 살림 검은 지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이 필 때 붉은 고무대야에 수돗물을 틀어놓고 찌든 이불을 치댈 때 흰 구름이 지붕을 덮고 나무를 덮고 마을을 덮고 지나갈 때 까칠까칠한 수염의 가장이 숫돌에 칼끝을 문지를 때 지붕으로 뛰어올라온 닭이 벌어진 꽃의 이름을 캐물을 ..
소리 내어 읊다―신흠(申欽·1566~1628)/벌레잡이꽃 7장 소리 내어 읊다 믿지를 못하겠네, 인간의 술이 가슴속 걱정을 풀어낸단 말 거문고 가져다가 한 곡조 타고 휘파람 길게 불며 언덕에 올라 천리 너머 먼 곳을 바라보자니 광야에는 쏴아 쏴아 몰려온 바람 현자도 바보도 끝은 같나니 결국에는 흙만두가 되어버리지 작은 이익 얼마나 도움된..
파도―황베드로(1940~ )/재갈매기 8장 파도 바닷가 모래톱에 동시 하나 써 놓고 돌아앉아 손 우물 파다 보니 파도가 다 외웠다고 하얗게 지워버렸네 가방에 꽉 찬 방학 숙제 파도에게 갖다 주고 우리는 놀까? 갈매기처럼 ―황베드로(1940~ )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동시(2012.7.28)디다. 이준관 아동문학가의 평이다. 이 동시를 읽..
분꽃송(頌)―한분순(1943~ )/분꽃사진 6장 분꽃송(頌) 환히 웃었지만 곁에 설 머슴애 있니? 사위듯 피는 꼴이 제참에도 사뭇 수줍어 마당을 한 바퀴 돌다가 먹빛 티로 남는다. 긴 비[雨]에 지치면 말인들 뛸까만 여름이 지루해서 산도 제자리채 녹네 슬며시 감기는 빛살 문득 신선한 이마여. ―한분순(1943~ )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