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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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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 도배일기 18- 강병길 봄날 - 도배일기 18 양지쪽엔 쑥이 제법 새순을 틔웠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른 봄날 모양낼 것 없고 생긴 대로 깨끗하게만 해 놓으면 되는 월세방 일은 쉽게 끝났다 연장을 챙겨 나오다 보니 주인이 대문에 종이를 붙인다 언뜻보면 반야심경 한 구절 같은 '삭을새놈 보증오십 월십오..
구상(具常) 선생의 ‘은총에 눈을 뜨니’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을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
그분이 홀로서 가듯- 구상(具常) 그분이 홀로서 가듯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서 무력(無力)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敗北)의 쓴잔을 마시더라..
담백함- 허필 담백함(澹泊) 담백함은 가난뱅이가 살아가는 법 등불없어 달 뜨기만 기다린다 꽃을 꺾자니 사랑스러운 것을 어떻게 없애고 풀을 베자니 산 것을 차마 해치랴 백발은 당연히 내 차지고 청산은 어느 누가 욕심을 낼까 미친 노래 부르다가 한 해도 저무나니 가을의 기운 검처럼 서슬 퍼렇다 ..
나무들 5- 김남조 나무들 5 무게를 견디는 자여 나무여 새둥지처럼 불거져 나온 열매들을 추스르며 추스르며 밤에도 잠자지 않네 실하게 부푸는 과육 가지가 휘청이는 과실들을 들어 올려라 들어 올려라 중천의 햇덩어리 너의 열매 무게가 기쁨인 자여 나무여 늘어나는 피와 살 늘수록 강건한 탄력 장한 ..
참새의 얼굴- 박목월 참새의 얼굴 얘기가 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참새가 한 마리 기웃거린다 참새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 모두들 얘기가 하고 싶은 얼굴이다 아무래도 참새는 할 얘기가 있나 보다 모두 쓸쓸하게 고개를 꼬고서 얘기가 하고 싶은 얼굴이다 - 박목월(1916~1978)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동시(2012년4..
우화(遇話)- 장수현 우화(遇話) 점심 때 소머리국밥 먹고 트림하면 소 울음소리 난다 샐러리맨은 소의 후손이야 넥타이는 신종 고삐지 거울 속 음매음매 울며 나를 쳐다보는 소 한 마리 콘크리트로 무장된 도시 더 이상 갈아엎을 수 없다 발굽이 다 닳았군 가죽도 헐거워졌어 나는 또 도살장에 끌려가듯 엘리..
좌복- 이홍섭 좌복 외진 절에서 기다란 좌복 하나를 얻어왔다 누구에게나 텅 빈 방 안에서 온몸으로 절을 올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찔레나무 가지 끝에서 막 고개를 쳐드는 자벌레 한 마리 가지가 찢어져라 애먼 하늘을 볼 때 - 이홍섭(1965~ ) - 가슴으로 읽는 시(조선일보 4월2일 월요일) 우리들 생(..